“우리는 어떻게 정해진 대답과 익숙한 삶을 넘어,
질문하고 행하며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요?”
인간이 만든 문명은 불편함과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생각한 결과입니다. 이미 있는 대답에 머무르지 않고 질문을 던질 때, 인간은 현재를 넘어 ‘다음’의 자기와 새로운 세계로 건너갑니다.
『반야심경』의 ‘바라밀다’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보시처럼 본능과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일부러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은 익숙한 자기로부터 건너가는 지적 훈련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먼저 안 뒤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행하는 동안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외부의 지식과 관념에 삶의 주인 자리를 내주지 않고 “나는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스스로 물을 때, 삶에서 얻은 앎은 지혜가 되고 인간은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강연 목차
정해진 대답에 머무르지 않고 질문을 던질 때, 인간은 현재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며 새로운 세계를 만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크게 인간이 만든 것과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의 총합이 자연이라면, 인간이 만든 것의 총합은 문명입니다. 지퍼와 옷, 마이크와 우주선처럼 문명을 이루는 수많은 물건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불편함을 느끼고 문제를 발견한 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한 결과입니다. 창의성도 보이지 않던 문제를 발견하고 이전과 다른 해결을 만들어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명은 대답보다 질문의 결과에 가깝습니다. 대답은 이미 정해진 지식과 이론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질문은 그 경계를 넘어 아직 없는 답을 향합니다. 그렇기에 질문하는 일은 지금의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입니다. 익숙한 대답을 반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불편함과 문제를 새롭게 감지할 때, 인간은 이전에 없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다음’입니다. 인간은 지금 주어진 모습에 머무르기보다 기대되는 자기, 되고 싶은 자기를 향해 살아갑니다. 현재의 자기는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다음의 자기를 향한 도약대이자 디딤돌입니다. ‘건너가는 자’란 이미 있는 답과 현재의 자기에 안주하지 않고, 질문을 통해 다음의 자기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더 많은 답을 아는 데서가 아니라, 지금의 불편함을 문제로 발견하고 ‘다음’을 묻는 데서 열립니다.
바라밀다는 본능과 감정의 익숙한 반응을 넘어,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는 실천입니다.
『건너가는 자』라는 말은 『반야심경』의 ‘바라밀다’에서 그 뿌리를 찾습니다. 『반야심경』은 방대한 반야부 경전의 핵심을 260자에 압축한 경전으로, 정식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이 가운데 바라밀다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건너감은 알고 있는 관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일로 제시됩니다.
반야·보시·지계·선정·정진·인욕의 육바라밀은 고통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여섯 가지 수행입니다. 실패와 수치를 견디는 인욕,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내어주는 보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집중하는 선정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익숙한 반응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는 훈련입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고통의 틀과 익숙한 반응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라밀다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건너감에는 ‘일부러 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이 곧 생각은 아닙니다. 생각에는 일정한 목적과 방향, 수준과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감각으로만 보면 지구가 평평하고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산하고 숙고하면 그와 다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눕고 싶을 때 눕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욕구가 생겨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의 지적 능력이 드러납니다. 건너간다는 것은 감정과 본능에 끌려가는 삶에서 벗어나 생각하고 숙고하며, 선택한 방향으로 자신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본능과 감정이 이끄는 반응을 넘어, 숙고하여 선택한 방향으로 자신을 움직이는 힘이 우리를 익숙한 자기 너머로 이끕니다.
외부의 이론과 관념에 주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계속 묻고 읽을 때, 삶에서 얻은 앎은 지혜가 됩니다.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앎과 삶의 순서를 보여줍니다. 세계가 공(空)하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는 가운데 세계가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 그 결과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세계와 직접 접촉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입니다. 지식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이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이론이 삶의 주인이 됩니다. 『국가』와 『장자』는 플라톤과 장자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내며 도달한 사유의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은 책의 결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낳은 사유의 태도와 삶의 힘을 보는 일입니다. 직접 행하고 그 과정에서 알아갈 때 삶과 지식의 순서가 바로 섭니다. ‘네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도 이론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외부의 관념이 자기 삶을 대신하도록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반야심경』 마지막의 주문은 자기 자신을 깨우는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약속하고, 자신을 두드리고 깨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오랫동안 물으면, 묻는 자기와 대답하는 자기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삶의 방향은 외부의 지식이 대신 정해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묻고 직접 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앎이 자기 삶을 이끄는 지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