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인 줄 알고 깼더니 문자 알림입니다. 비몽사몽간 휴대폰을 확인합니다. 경계경보 발령 문자입니다. 곧바로 다시 잠을 청합니다. 잠시 뒤 알람인 줄 알고 깼더니 또 문자 알림입니다. 이번엔 앞선 문자가 오발령이라는 문자입니다. 긴급히 다시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고요와 평온 속에 눈을 뜹니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왠지 불안합니다. 지각, 긴급 사태입니다.
지각은 안 됩니다. 아침밥은 커녕 물 한 모금 넘기기도 빠듯합니다. 허겁지겁한 나머지 물컵을 놓칩니다, 쨍그랑. 직감합니다, 운수 안 좋은 날. 오늘의 운세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따라 전철 운행이 지연됩니다. 출근길 전철 시위가 벌어진 겁니다. 플랫폼에 사람들이 밀집합니다. 발 디딜 틈 없는 전철에 몸을 싣습니다. 지옥철이 따로 없습니다. 도착역에서 인파를 뚫고 뛰기 시작합니다. 지각 3분 전, 간신히 엘리베이터 앞에 섭니다. 체력이 이미 다 바닥난 느낌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바로 열립니다. 그것도 혼자입니다. 21층, 초고속으로 올라갈 일만 남습니다. 웬걸, 빠르게 닫히던 문이 다시 열립니다. ‘오픈런’ 하듯 우르르 사람들이 올라탑니다. 4층부터 시작해 9층, 10층, 11층 저마다 설 층을 누릅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들 없습니다. 줄줄이 층층 설 때마다 짜증이 커집니다. 온몸을 기계 통에 맡겼으니 꼼짝하지도 못합니다. 한참 뒤 다들 내리고 다시 혼자가 됩니다. 가장 먼저 타고 가장 늦게 내렸습니다. 지각입니다. 지각은 안 됩니다. 분노가 들끓습니다. ‘새치기, 엘베 새치기’ 이상한 말을 중얼거립니다. 억울합니다. 어두워진 안색으로 사무실에 들어섭니다. 사무실 전체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모두가 사느라 바쁘고 힘겹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새치기’는 절대 용납할 수 없지요. 일상에서 가장 익숙한 공정이 ‘줄 서기’입니다. 붐비는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엘리베이터 새치기’란 말은 좀 과하고 엉뚱하지요. ‘과잉 감정’에서 비롯된 넋두리일 뿐입니다. 엘리베이터는 여럿을 위아래로 나르는 기계입니다. 만원이 아니라면 누구나 함께 이용하는 거고요. 물론 끼어들어 미안하다는 목례라도 건넸으면 좋았겠지요. 지각 직전 조바심에 충분히 화가 날 법합니다. 새벽녘 잠을 설치게 만들고 알람까지 무력화한 잘못된 알림은 더더욱 밉고요. 그보다 물컵이 깨진 것에 대한 불길함이 출근길 내내 머릿속을 휩쓸었을 겁니다. 아침에 뭔가 깨진다는 건 대개 ‘징크스’가 되니까요.
아침부터 물컵이 깨진 건 기분 나쁜 일임이 분명합니다. 이러면 악운이 따른다는 믿음이 크기 때문이지요. 우리 뇌에 이같이 인식의 패턴이 만들어진 겁니다. 축구 경기 중 골대를 맞추는 팀은 패한다는 속설도 비슷하고요. 징크스는 그 불길한 징조만으로 사람을 예민하게 만듭니다. 그 탓에 또 다른 징크스를 낳으며 악순환이 이어지고요. 벗어나야 한다는 조급함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허둥지둥하는 겁니다.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게 결코 쉽지 않지요.
긴급 문자를 무시하고 다시 잠든 것도 좀 어처구니없습니다. 그것도 대피 경보였는데요. 이렇듯 이웃 나라가 큰 공을 쏘든 작은 공을 쏘든 우린 꿈쩍없습니다. 참으로 기괴한 현상이지요. 이런 ‘쿨’한 반응에 외국인은 놀랄 따름입니다. 좀 씁쓸하지만 오랫동안 반복된 피로감이 우리의 감정과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지요. 웬만해선 놀라지 않고 특별히 대처하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일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일종의 ‘학습효과’이지요. 사태의 심각성을 고민하기보단 부족한 잠을 청하는 게 낫습니다. 우리에게 긴급 문자보다 시급한 게 잠이니까요. 이처럼 어떤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 우리 몸과 마음은 금방 익숙해집니다. 내성이 생겨 둔감해지는 거지요. 속된 말로 ‘약발’이 떨어지는 겁니다.
사실 ‘경각심’이란 감정은 생물학적으로 인류의 생존과 번식을 지켜준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천둥벌거숭이로 살면 희생되기 십상이었지요. 정신을 차리고 주의 깊게 살피며 경계해야 그나마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정신줄’을 놓지 않는 거지요.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살아 있으려면 정신의 벼리는 절대 끊어져선 안 되었던 겁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우리는 비상사태에 재빨리 대비하던 ‘감정’ 시스템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우선 감정을 통해 환경을 인식하고 반응해왔던 거지요.
징크스를 가지는 것도 일종의 경각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만큼 마음을 다잡아 조심해야 한다는 신호이지요.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판에 박힌 말만 되풀이할 수 없습니다. 무방비했던 자신을 탓해야지요. 사실 징크스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과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의 ‘감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징크스가 우리의 평온을 해칠 만큼 여전히 힘이 센 건 바로 이 감정 때문이지요.
인간의 감정은 타고나는 것도 유전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건 감정을 학습할 수 있는 ‘신경시스템’일 뿐입니다. 뇌의 기본적인 구조는 모두가 비슷하게 타고나지만, 뇌 신경회로의 세부 배선은 성장 과정에서 환경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조정되고 수정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기억을 쌓고 스스로를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뇌의 신경회로 가운데 더 자주 연결되는 것들이 생기고, 이에 따라서 각자의 뇌에 신경경향성이라는 것을 갖게 됩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처럼 뇌 회로의 배선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구조가 똑같은 아파트라 해도 집집마다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기쁨도 다 같은 기쁨이 아니고 슬픔도 다 같은 슬픔이 아닌 거지요. 얼핏 보면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듯하지만 실상 그 몸을 통제하고 명령하는 것은 ‘신경시스템’입니다. 다시 말해 뇌에서 발현된 감정의 결과가 인생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존재는 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씁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토록 감정이 발달했을까요! 감정이 없으면 한결 ‘홀가분’해질 텐데요. 감정의 가치는 그야말로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습니다. 즉 감정은 생명 존속에 유리하고 불리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쾌(快)’와 ‘통(痛)’의 감각에 기반한 감정은 각각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알려주지요. 감정이 없으면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예측할 수 없으면 위기에 대비하며 미래를 준비할 수 없고요. 감정이 없으면 기억의 가치 또한 소멸하고 맙니다.
인간의 경험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도 살아갈 이유를 제공하는 것도 감정입니다. 감정은 자극으로부터 예측되는 가치를 보여주며 행동의 동기를 만듭니다. 그래서 감정의 크기가 행동의 강도와 지속성을 결정하지요. 그런데 감정의 강도를 결정하는 건 ‘실질 가치’가 아니라 ‘기대 가치’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감정이 품고 있는 기대가 곧 가치가 되는 거지요. 행동으로 옮겨서 획득한 가치가 기대했던 가치보다 크면 ‘기쁨’, 적으면 ‘실망’이라는 대가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보통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보단 여행을 계획하며 기대할 때가 더 즐겁습니다. 또 연인과 데이트를 끝냈을 때보단 만남을 기다리는 설렘이 더 달콤하고요.
기대했던 가치와 실제로 보상받은 가치가 다를 때 이를 ‘보상예측오류(RPE, reward prediction error)’라 부릅니다. 보상 가치가 기대했던 가치보다 작으면 실망하고 그 차이에 따라 서운하거나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보상 가치가 기대했던 가치보다 크면 즐거움이나 성취감, 감동을 느끼겠지요. 기대했던 것보다 보상받은 것이 터무니없이 적으면 상실감이 찾아옵니다. 대부분의 부정적 감정은 상실감에서 비롯되고요. 상실감이 너무 크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심한 경우 증오심까지 느끼는 겁니다.
우리는 감정을 빼놓고 ‘인간다움’을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 감정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지요. 감정이 아무리 얄궂어도 감정 없는 인간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감정 앞에서 무력한 존재입니다. 하루에도 수차례 슬퍼하고 분노하며 짜증을 냅니다. 또 부러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감정 때문에 인생이 고달프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로애락의 감정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지요. 그만큼 감정을 다루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감정은 거의 내 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하루하루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는 탓에 감정을 돌볼 여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회사 일로 바쁘고 집안일에 치이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일해도 돌아오는 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오해와 원망 따위입니다. 서로 상처를 입고 입히는 거지요. 분노와 억울의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고요. 그러나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드는 건 분명 감정입니다. 감정은 인생에 탄력을 주고 기대감을 선사하며 타인과 공감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풍부한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사랑하고 성취하고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겁니다.
내 안에 무엇이든 감정이 생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싫은 것도 있다지만 실상은 그 이유를 잘 몰라서 그럴 뿐입니다. 감정이 생기면 그걸 인정하고 그 감정을 무시하지 말고 충분히 느끼면 됩니다. 물론 긍정적 감정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너무 적어도 안 됩니다. 정말 필요할 때 감정이 무뎌진 채로 작동하지 않으면 큰일 나니까요. 우린 여전히 ‘위험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조심(操心)’ 즉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늘 신경 쓰며 살아야 하지요. 징크스를 깨는 힘도 여기에서 나오고요. 아침부터 뭔가를 깨뜨렸으면 그만큼 더 조심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징크스도 깨집니다. 징크스는 깨지라고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보시(布施)’를 강조합니다. 보통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만 알고 있지만, 더 분화되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심시(心施)’입니다. 내가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편해지고, 이 또한 남에게 베푸는 보시라는 것이지요. 어쩌다 지각으로 내 감정도 사무실 분위기도 망쳤다면 마음먹고 ‘환기(換氣)’하면 됩니다. 감정은 공기와 같으니까요. 마음에 대한 인식과 집중력을 높이면 그 하루가 충만해질 겁니다. 아니,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인생 전체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봄이 다가옵니다. ‘봄 탄다’는 사람이 많아지겠지요. 싱숭생숭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처럼 감정은 계절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계절성 우울증은 보통 가을이나 겨울에 시작되어 봄이 되면 싹 없어지지요. 감정은 봄바람처럼 스쳐가는 겁니다. 감정도 ‘변화’가 ‘상수(常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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