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으로 푸는 경영, HR(인사), 사람, 인생 전문 칼럼

편향 | 오리가 뒷짐을 지고 걷는 이유

Written by 자인플랫폼_곽민지 | Feb 26, 2024 6:24:22 AM

‘Naeronambul’이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옥스퍼드 대사전에 신조어로 올랐다는 ‘영어’입니다. 우리말로는 발음 그대로 ‘내로남불’이지요. 직역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뉴욕타임스〉도 번역 없이 그대로 쓴다지요. 소위 ‘K단어’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우리가 하도 입에 달고 사니까요. 정작 우리 국어사전엔 없지만 말입니다. 이 말은 남이 할 때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땐 ‘합리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기 논에 물 대기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위선’이지요. 맹자가 말한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요! 

 

 

 

 

‘내로남불’의 진원은 다름 아닌 ‘정치판’입니다. ‘선거’라는 큰 ‘장(場)’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이 말이 또 얼마나 많이 오르내릴지! 올봄은 아무래도 선거에 파묻히겠지요. ‘선거철’이 다가올 봄을 뜨겁게 달굴 겁니다. 선거철만 되면 희망과 우려가 교차합니다. 정치판만큼 갈등하고 분열하는 현장이 있을까요? 그것 참 기괴하지요. 설득과 타협이 정치의 기본 아닌가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며 상호 간의 이익을 조정하는 일이 정치이건만, 서로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어뜯기 좋은 흠집거리 찾기에만 열중하지요. 곧 거리 곳곳에 현수막이 내걸리고 후보들 사진이 나붙고 정치적 고성과 율동이 난무하고 유세 인파가 굽이치겠지요. 어쩐지 짠하기도 합니다. 당선과 낙선이라는 기로에서 애를 태울 모습들을 떠올리니 말입니다. 

 

선거는 ‘사실’이 아니라 ‘인식’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보다는 그걸 유권자가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진실과 승부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런 인식이 고스란히 선거 결과로 나타나고요. 온통 광고와 홍보로 덮인 마케팅과 다름없습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무조건 좋은 제품이 잘 팔리는 건 아니지요. 정치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모두가 대중 현혹과 선동에 나섭니다. ‘바이럴’이 중요하니까요. 이를 위해 보여주지 않아도 될 부분은 철저히 은폐합니다. 가장 적은 정보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없는 사실도 꾸며 만드는 ‘주작(做作)’도 서슴지 않습니다. 유권자의 기억 속으로 파고드는 전쟁인 셈이지요. 이러니 진실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그걸 보기 힘듭니다. 진실이 존재한다면, 우리 뇌와 눈 너머에 존재할 겁니다. 

 

 

 

 

‘게슈탈트(gestalt)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게슈탈트’는 형태나 모양을 의미하는 독일어입니다. 여기선 인간이 무엇을 받아들이는 방식, 즉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중 하나로 빠진 정보를 스스로 채워 완성된 정보로 이해하는 것도 있습니다. 뒷골목에서 어쩌다 다리 세 개로 걷는 고양이를 보면 처음엔 다리가 네 개로 보입니다. 고양이 다리를 네 개로 기억하니까요. 많이들 사용하는 ‘이모티콘’이나 ‘이모지’도 좋은 예입니다. 단순한 기호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긴 문장을 사용하지 않고 감정이나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그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터넷에 놀이처럼 난무하는 ‘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를 조각내 필요한 것만 퍼뜨리지요. 메시지 주입을 위해 아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기술입니다. 좋게 말하면 우리 뇌의 융통성이나 이해력이 무척 훌륭한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게슈탈트적 인식’은 우리 뇌의 인식 체계의 무서운(?) 단면도 보여줍니다. 외부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수정하고 보강하여 새로운 형상을 만든다는 거지요. 그러다 보면 아주 자주 ‘오류’에 빠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부분이 전체를 잡아먹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게 됩니다. 바로 ‘편향’이라는 거지요. 

 

 

‘편향(偏向)’이란 말의 뜻은 편견을 갖게 되는 ‘경향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아예 ‘편향성’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편향은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의식적 본능에 가깝지요. 사실 편향은 인간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뇌의 전략입니다. 생물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늘 ‘항상성’입니다. 복잡다단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 현상을 지키지 위한 것이지요. 욕구와 욕망은 물론 우리가 지향하는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도 결국 항상성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특정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선 ‘편향’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포기하거나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것들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생물로서 인간은 존속에 유리한 편향을 유전자에 축적하면서 진화해왔습니다. 

 

 

편향은 일상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확증되기 일쑤이고요. 인간은 이미 경험한 몇 가지 정보만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새로운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취사선택해 유리한 것만 보지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겁니다. 그게 편하니까요, 쉬우니까요, 스트레스도 덜 받으니까요.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치적 편향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왕 오랫동안 쌓고 지켜온 터라 앞으로도 쉽게 바꿀 수 없지요. ‘오기’ 때문에라도 안 바뀝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울기가 더욱 견고하게 가팔라질 뿐입니다. 진실이 아니라 집단의 언동에 영합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휩싸이는 거지요. ‘이게 다 누구누구 때문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함께 ‘진영’을 만들고, 그 안에서 기꺼이 안전한 군중으로 남습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인생의 열정과 동력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왜 자신이 특정 진영을 지지하는지 자신도 잘 모릅니다. 설령 이런저런 이유를 댄다 해도 그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 뇌가 만들어낸 명분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도 ‘습관화’된 편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편향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를 갉아먹는다는 데 있습니다. 갈등과 차별과 혐오를 발생케 하는 근본 원인이기도 한 겁니다. 편향은 우리 안에 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의식은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에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무의식이 감정이나 생각으로 굳어지면 ‘마음의 습관’이 되고, 몸으로 표현되면 ‘행동의 습관’이 됩니다. 편향이 악행을 낳을 수 있는 겁니다. 최근 일어난 정치인에 대한 살인 시도나 폭력 행위가 그 예입니다. 습관은 오랫동안 축적되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신경적 편향’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습니다. 뇌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한 우리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는 주관의 창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 그렇다고 핑계만 대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요. 인식이 기울면 그걸 따라 인생도 기우니까요. 이렇게 인간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스스로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편향을 스스로 알아채느냐, 그리고 다른 원인에도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가 과제입니다. 나쁜 편향을 극복하고 합리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두 가지 기준에 엄격해야 합니다. ‘나의 편향이 객관적 합리에 기반하는가?’, ‘나의 편향이 합리적 가치를 지향하는가?’ 늘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객관적 합리’란 ‘이치(理致)’에 기반한 시각을 의미하고, ‘합리적 가치’란 나보다는 남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공존(共存)’에 기여하는 걸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충족하려면 ‘좋은’ 편향을 ‘습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편향은 뇌의 습관이기 때문에 반복적 학습과 실천을 통해 바꿀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뇌에 새로운 길을 내는 거지요. 뇌에 어떤 길을 내는지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가치 있는 길이 점차 넓어지고 평평해지듯 습관도 가치의 획득을 반복적으로 경험할수록 강화됩니다. 묵은 편향을 털어내고 새로운 편향을 반복하여 뇌에 새기면, 좋은 편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언젠가 교외 오리농장에 들렀다가 재밌는 광경을 봤습니다. 어린애 하나가 뒤뚱뒤뚱 걷는 오리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린애답지 않게 뒷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리를 흉내 냈던 겁니다. 자기 눈에는 날개 접은 오리의 모습이 마치 사람이 뒷짐을 진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꽤 그럴 듯했습니다. 누군가는 무릎을 칠 정도로 기발하다고까지 했고요. 그 아이처럼 우린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이는 대로 스스로 편리하게 해석합니다. 그걸 또 서로 주고받습니다. 그 후 공원에서 비둘기 떼를 볼 때마다 뒷짐이 연상되더군요. 그저 귀엽게만 볼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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