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덤불 속』은 한 남자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산속 덤불 속에서 한 무사의 시체가 발견되고,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 나옵니다. 도적도, 아내도, 지나가던 사람도, 심지어 죽은 남자의 혼령까지, 각자의 진술은 모두 다른 결론으로 향하지요.
자신이 본 것과 기억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명예, 체면, 자존심을 지키려고 저마다 유리하게 사건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작가는 하나의 사건에는 여러 개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도 나름의 시선과 이해가 개입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합니다. 주관이지요. 여기에 자신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더해집니다. 이기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갑니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우리는 상대의 말과 표정, 태도와 행동을 보면서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눈앞에 드러난 그것은 본성이라기보다 여러 조건이 만들어낸 표면적 결과에 가깝습니다.
사람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위해서는 드러나 보이는 현상적 인식에 머물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 속성까지 들여다보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현상의 작동 원리를 보지 못한 채 겉모습만 보면서 사람을 해석해왔고, 그 결과 수많은 오해와 편견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을 이해할 때 반드시 마주하는 두 가지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관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입니다.
주관은 내가 경험한 세계와 기억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게 합니다. 이기는 내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행동하게 하고요. 이 둘 모두 인간에게 본래적인 모습입니다.
문제는 주관과 이기가 세상을 이해하는 창이 아니라 세상을 가두는 틀이 될 때입니다.
주관과 이기는 없애기 힘든 본성이지만,
그것들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구성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주관적인 존재입니다.
특히 기억은 그대로 저장되는 기록이라기보다, 그때그때의 감정과 맥락에 영향을 받으며 다시 조립되는 이야기이지요. 인간의 인식은 경험과 기억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편향과 편견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주관은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흔히 ‘주관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각과 기억을 통해 세상을 만납니다. 살아온 경험은 낯선 상황을 이해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고요.
비슷한 맥락에서 의식과 이성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와 감정, 경험의 영향을 받으며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감정은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는 요소로만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과 신체적 신호는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과정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사람을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만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선택의 결과를 설명할 수 있어도, 그 선택이 만들어지는 복잡한 과정까지 충분히 들여다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의식과 이성, 객관성과 합리성의 아래서 작동하는 경험과 기억, 감정과 욕망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함께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을 흔히 ‘이기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욕망의 존재, 이기의 존재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가 맞습니다.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우선하는 이기성이 오랜 진화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거쳐 유전자에 새겨졌으니까요.
그렇다면 타인을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은 이기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조상은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즉각적 이득을 포기하는 대신, 공동체에서의 협력을 통해 더 큰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타성이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이타성은 도덕적 당위가 아닌 생물학적 지혜입니다. 인간이 이타적 존재로 진화한 것은 집단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생물학적 선택의 결과이자, 사회적 지혜이기도 합니다.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유리하고, 집단이 강할수록 개인도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타인과 협력하며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타적 행동과 사회적 유대는 생존을 위한 본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공감과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본성은 인류가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종(種)이 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기도 하고요.
이기성과 이타성을 서로 반대편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돕고, 타인을 지키는 일이 결국 나를 지키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요. 이타적 행동은 이기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인 셈입니다.
어쩌면 이타성은 이기성의 확장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범위를 우리로 확장한 이기성 말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알의 이미지를 떠올려볼까요.
소설에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새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깨뜨려야 하지요.
주인공 싱클레어도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를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부모의 집은 사랑과 질서가 있는 곳이었지만, 성장하면서 그는 그 세계의 기준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욕망과 두려움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합니다.
우리 역시 저마다 하나의 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알을 이루는 것은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과 기억이지요. 내가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누구를 믿고 경계하는지, 무엇을 얻으려 하고 지키려 하는지가 그 안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깨야 할 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식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주관의 알,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기의 알입니다.
앞서도 봤지만, 이 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만 머물면 타인을 이해하고 더 좋은 인생을 만들어가는 데 한계가 생깁니다.
주관의 알을 깨는 일은 내가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식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존재로 여기지만,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의식만이 아닙니다. 무의식과 감정, 경험과 기억이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내가 겪은 일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의 일부일 뿐입니다. 같은 사람도 나와 다른 관계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예전에 맞았던 판단이 지금의 조건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고요.
주관의 알을 깨려면 우선 내 판단과 행동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령 ‘상대가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 때, 실제로 들은 말과 그 말에 붙인 뜻을 구분해보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떤 사정을 아직 모르는지, 다른 설명도 가능한지 확인해야 하지요. 상대에게 직접 물어보고, 자신의 기억과 어긋나는 사실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합리적 객관’은 이러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자신이 가진 관점의 한계를 알고, 더 많은 사실과 더 넓은 관계를 살펴 판단을 보정하는 것이지요.
모든 의견을 똑같이 옳다고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근거가 충분한 설명과 부족한 설명을 가리되, 새로운 근거가 나타나면 내 결론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틀렸다”라는 말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믿어온 판단에는 자신의 경험과 자부심까지 담겨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판단을 수정한다고 그 판단을 하며 살아온 내 인생 전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더 알게 된 사실을 앞으로의 인생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나를 이해하면서 현재의 판단을 고치는 일이 함께 가능한 것이지요.
이기 역시 하나의 알입니다.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이익을 지속하려면 관계와 신뢰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타적 행동이 함께 작동할 수밖에 없는 ‘관계적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존과 보상에 민감하도록 진화해왔지만, 보상과 안전을 얻는 길은 대개 관계와 협력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익을 계산하는 동시에 관계를 지키려 하고, 그 관계를 지탱하는 신뢰는 배려와 기여 같은 이타적 행동으로 쌓이고요.
결국 ‘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인간의 선택은 늘 이익의 계산과 관계의 유지가 함께 움직인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 마음이 이기의 알이 되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필요만으로 관계의 기준을 정할 때입니다.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상대는 기다려야 하고, 내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자녀는 내 말을 따라야 합니다. 내게 절실한 만큼 상대에게도 절실한 사정이 있다는 사실이 판단에서 빠지는 것이지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불교 용어가 있습니다. 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남을 위하여 불도를 닦는 일을 말하지요. 자리이타는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타자리(利他自利)’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먼저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요.
주관과 이기를 돌아볼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이미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판단했을까?’,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 걸까?’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메타인지’, 즉 이처럼 판단하고 있는 자신까지 함께 보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다른 선택을 검토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혼자 오래 생각한다고 충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놓친 것은 내 생각 안에서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관점과 실제 결과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끝까지 듣고, 상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확인하고, 내가 실행한 일이 의도대로 작동했는지도 돌아봐야 하지요. 성찰은 혼자만의 생각에 머물 때보다 소통과 경험을 통해 더 깊고 정확해질 수 있습니다.
회의에서 동료가 내 제안에 반대했다고 해보지요.
처음에는 불쾌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은 아닌지 돌아보고, 동료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업무가 과도하게 몰린다는 이유라면 역할이나 일정을 조정해 실행해보고, 이후 부담과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함께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는 주관과 이기라는 두 알을 깨는 일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조건을 받아들여 판단을 고치고, 상대가 감당할 몫을 고려해 계획을 바꾸는 것이지요. 상대를 이해한 내용이 내 행동을 바꾸었고, 바뀐 행동은 새로운 경험을 만듭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다음 반론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응도 늘어나고요.
언제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해가 충돌할 때는 서로 납득할 기준을 세워야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에는 거절도 필요하지요. 부당한 대우가 반복되면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거나 제도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요. 나 역시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포함해 관계를 살피는 것입니다.
물론 알 깨기를 계속하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반응은 남을 수 있습니다. 피곤하면 자기 생각만 옳다고 느끼고, 불안하면 당장의 이익을 먼저 붙잡을 수 있지요.
그런 순간을 알아차리고 다시 확인하며 조정하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한 번의 깨달음만으로 달라지기는 어렵지만, 이런 실천이 반복되면 이전보다 깊이 보고 넓게 고려하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나와 세상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를 둘러싼 관계는 삶이 펼쳐지는 조건이며, 나는 그 관계에 영향을 주는 당사자입니다. 당장의 편의를 위해 약속을 가볍게 여기면 다음 협력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여를 인정하고 공정하게 나누면 함께 일할 이유가 생깁니다. 내가 관계를 대하는 방식이 앞으로 살아갈 조건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이해하면 이익을 바라보는 범위도 넓어집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얻는지와 함께, 그 선택이 신뢰와 협력에 어떤 영향을 남기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서로가 관계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 결과를 함께 누릴 방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현명한 이기’는 자신의 바람을 이런 상호성 속에서 다루는 태도입니다. 나의 성장이 타인의 성장과 공존할 수 있도록 관계를 다루는 성숙 말입니다. ‘상리공생(相利共生)’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다시 『덤불 속』을 떠올려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은 누군가 반드시 거짓말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본 것과 기억한 것, 믿고 싶은 것과 유리한 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각자의 덤불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관과 이기가 뒤엉켜 진실에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인식의 숲 말입니다.
그렇다면 알은 무엇일까요.
덤불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리’라면, 알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드는 나의 ‘경계’입니다. 덤불이 인식의 숲이라면, 알은 그 숲을 둘러싼 경계인 셈이지요.
성장은 덤불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이지요. 그리고 그 세계를 만나기 위해 나를 둘러싼 알, 그 경계를 조금씩 깨뜨리는 일입니다.
내 생각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이해로 나의 행동을 나와 남을 위해 바꾸는 것.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관과 이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인 이상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중심으로 판단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할까.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상대의 자리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의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이 질문들이 생각과 행동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처음의 반응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다른 판단과 선택을 검토할 수 있고요.
성장은 주관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주관을 가지되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되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과 기억은 내게 중요한 정보이지만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이익은 내가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만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요.
결국 나를 넘어선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더 넓은 관계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모든 콘텐츠는 제공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거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