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찍 자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손이 먼저 휴대폰을 찾습니다. 잠깐만 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짧은 영상을 끊임없이 넘기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봐야지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은 화면을 계속 움직입니다. 잠이 안 와서 휴대폰을 보는 건지 휴대폰을 봐서 잠이 안 오는 건지, 무한의 굴레 속에서 밤은 깊어집니다.
누군가의 말에 화가 났을 때도 비슷합니다. 화를 내겠다고 먼저 결정한 뒤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표정이 굳고, 심장이 빨라지고, 핏대가 서며 날카로운 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그러고 나서야 생각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냈지?
우리는 흔히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한다고 믿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내가 결정하기 전에 이미 행동은 시작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980년대 미국의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은 이 질문을 실험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참가자들에게 원하는 순간 손목을 움직이게 하고, 뇌의 전기적 활동과 움직이겠다는 결심의 시점을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손목을 움직이겠다는 결심에 앞서 뇌에서 이미 ‘준비전위’라는 신호가 나타났습니다. 의식적인 결심보다 뇌의 준비 활동이 먼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실험 결과는 곧 이런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내가 결정하기 전에 뇌가 먼저 결정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2008년에는 더 흥미로운 연구가 나왔습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춘시옹 순과 동료들은 참가자들에게 원할 때 왼쪽 또는 오른쪽 버튼을 누르게 하고,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선택 전의 뇌 활동을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전전두엽과 두정엽의 활동 패턴에서 참가자가 어느 버튼을 누를지에 관한 정보가 의식적인 선택보다 최대 약 7초 앞서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리벳의 실험은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복잡한 결정과는 거리가 있는 단순한 움직임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이후 연구에서는 준비전위가 특정한 결정의 신호라기보다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의 변동이 행동의 문턱에 가까워지는 과정일 수 있다는 해석도 제시되었고요.
중요한 것은 실험의 결론보다 그 실험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의식적인 결심이 행동의 최초 원인이 아닐 수 있다면,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일까요?
자유의지를 둘러싼 오랜 논쟁에는 크게 세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결정론은 인간의 행동이 이전의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봅니다. 유전자와 뇌, 신체 상태, 과거의 경험, 기억과 환경이 지금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론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주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선택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양립론은 두 입장의 긴장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인간의 선택이 여러 원인과 조건의 영향을 받더라도 외부의 강제 없이 자신의 욕망과 이유에 따라 행동했다면 일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지요.
세 입장은 오랫동안 대립해왔지만 어느 하나도 인간의 전체 모습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논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자유를 조금 이상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을 어떤 원인이나 조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선택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커피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커피의 맛을 좋아할 수도 있고, 잠이 부족할 수도 있고, 익숙한 향을 원할 수도 있고요. 그 모든 이유를 제거하고 아무런 원인도 없이 커피를 선택한다면 그 선택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무엇 때문에 선택했는지 알 수 없는 무작위에 가깝지 않을까요?
이유가 있다는 것과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경험, 가족의 기대, 경제적 조건,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함께 작용합니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모두 나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왜 그것을 원하는지 이해하고 그 이유에 따라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 선택은 나에게 속합니다.
자유를 조건이 없는 선택으로 정의하면 인간에게 자유는 거의 남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유를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이유와 가치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으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말을 들으면 유난히 상처받는 이유가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쉽게 불안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방식도,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사랑하는 방식도 살아온 경험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조차 처음부터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거가 만든 결과일 뿐일까요?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생깁니다. 나는 과거의 영향을 받지만, 지금의 행동은 미래의 조건을 만듭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면 그 행동은 단순히 오늘 하루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상대와의 관계에 흔적을 남기고, 그 관계에서 새로운 기억이 생깁니다. 그 기억은 다음번 비슷한 상황에서 나의 반응에 영향을 줄 수 있고요.
반대로 화가 올라오는 순간 잠시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했다면 어떨까요. 그 경험 역시 새로운 기억이 됩니다. 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쉽게 멈출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행동은 이런 순환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과거의 경험 → 기억과 욕망 → 현재의 반응 → 의식적 판단 → 행동 → 새로운 경험 → 달라진 다음 반응.
이 순환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지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의지를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지는 그보다 먼저 형성됩니다.
일단 무엇인가를 원해야 합니다. 욕구와 욕망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가치 있다고 느껴져야 합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원합니다. 인정받고 싶으면 성취를 원합니다. 관계를 지키고 싶으면 상대의 마음을 고려합니다. 더 나은 삶을 원하면 현재의 편안함을 조금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욕구와 욕망에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감정은 그 가치가 지금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이성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 판단하고요.
의지는 감정과 이성이 서로 싸워 이기는 과정만은 아닙니다. 감정은 방향을 만들고, 이성은 방법을 찾고, 가치에 대한 성찰은 그 방향과 방법이 과연 내가 원하는 삶에 맞는지를 다시 살핍니다.
오늘 당장 즐거운 것을 원하는 마음과 건강한 미래를 원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화를 내고 싶은 마음과 관계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함께 존재할 수 있고요. 성과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과 다른 사람과 함께 성장하고 싶은 가치가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욕망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욕망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지요.
우리에겐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화가 났구나.’ ‘나는 왜 이렇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성공일까, 아니면 인정일까?’ ‘지금의 선택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맞을까?’
이처럼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능력을 ‘메타인지’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객아(客我)’라는 개념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객아는 나를 떠난 또 하나의 자아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화가 난 나와 화가 난 나를 바라보는 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나와 그 욕망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내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요.
‘자의지’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힘이라면, ‘메타적 자의지’는 ‘나는 왜 이것을 원하며,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를 다시 바라보는 힘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휴대폰을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까지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내려놓을 것인지, 다른 행동으로 전환할 것인지, 혹은 계속 사용할 것인지는 다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 번의 결심만으로 모든 습관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매번 새롭게 결심하는 의지만이 아닙니다. 반복되는 행동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이 다음 행동을 만드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방법도 조금 달라져야 합니다. “나는 왜 의지가 이렇게 약할까?” 이렇게 묻기보다, “내가 원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어떤 조건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지요.
일찍 자고 싶다면 잠자리에 들어서 휴대폰과 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휴대폰을 침대에서 멀리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운동하고 싶다면 매일 운동할 의지를 새롭게 끌어올리기보다 운동복을 미리 준비해 놓고, 일정한 시간에 같은 장소로 가는 환경을 만들 수 있고요. 화를 줄이고 싶다면 화가 나지 않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예민해지는지 관찰하고, 감정이 행동으로 넘어가기 전에 스스로를 제어할 혼잣말을 미리 정해둘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가 약한 사람을 위한 요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법이지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더 강한 의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의지가 생겨나기 쉬운 환경과 조건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을 변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일입니다. 내가 어떤 말에 쉽게 흔들리는지, 어떤 관계에서 위축되는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는지 알아야 다음 선택에도 개입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이해하는 일은 운명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가 현재에 남겨놓은 경로를 알아보는 일이지요.
처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내가 결정하기 전에 행동은 이미 시작된 것일까?” 그럴 수 있습니다. 뇌는 의식보다 먼저 반응할 수 있고, 감정과 욕망은 내가 그것을 의식하기 전에 이미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습관은 지금의 선택에 깊이 관여하고요.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없는 것일까요?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합니다. 자유를 과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에게 그런 자유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가 만들어놓은 반응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반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을 수 있습니다.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경험과 기억, 관계와 습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결과이지 아직 미래의 결과는 아닙니다. 나는 미래를 만드는 현재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유는 아무런 원인도 없는 선택에 있지 않습니다. 자유는 나를 움직이는 원인을 이해하고, 그 원인이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에 현재의 내가 개입하는 데 있습니다.
자의지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이고, 메타적 자의지는 내가 왜 그 방향을 원하는지 다시 바라보는 힘입니다. 그리고 삶의 지혜는 그 둘을 충분히 발현시켜 앞으로 어떤 나를 만들어갈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밤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지도 모릅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지금 무엇에 이끌리고 있는지 묻는 것. 그리고 아주 작은 다른 행동 하나를 선택하는 것. 인간의 자유는 바로 그 작은 틈에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결정하기 전에 행동이 이미 시작되었더라도, 그 행동이 다음의 나를 만드는 과정에는 지금의 내가 다시 관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인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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