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떠나는 순간보다 떠나기 전이 더 바쁜 법이지요.
어디로 갈지 얼마나 있을지 정하는 것부터,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기까지 선택의 연속입니다. 정보는 또 어찌나 많은지요. 지도에는 이동 경로가 그려지고, 엑셀 시트에는 맛집 목록과 날씨 예보가 빼곡히 채워집니다. 머릿속에선 이미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하지요.
여행의 준비 방식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방 하나 둘러매고 일단 떠난 뒤 길 위에서 정하자고 말합니다. 우연에 기대는 여행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즉흥적인 여행이라도 최소한의 계획과 선택 없이 떠나는 여행은 없습니다.
현실은 왜 내가 계획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까요. 여행 중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의외의 순간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비를 피해 우연히 들어간 오래된 서점, 길을 잃고 발견한 이름 없는 맛집, 길을 묻다가 만난 낯선 사람의 따뜻한 미소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행에서 중요한 건 모든 상황을 선택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마주한 상황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지요.
세상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이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스스로 선택의 주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어떤 일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 어디에서 살아갈지 당당히 결정한다고 느끼지요. 물론 선택의 영역이 없진 않지요.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만나는 대개의 세상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우연히 직면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시대와 국가도 그렇고요. 성장한 환경도 고르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만난 가족과 친구, 선생님, 주변의 어른들 대부분도 내가 선택한 세상이 아니었고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지요. 직장에서 만나는 상사와 동료, 고객, 조직의 문화, 시장의 변화, 사회의 흐름 모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내가 선택해서 가진 게 아닙니다. 내가 마주하게 되는 조건일 뿐이지요.
영국의 작가 J. K. 롤링의 행보는 주어진 조건이 인생의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가 쓴 해리 포터 이야기처럼 그의 인생 역시 결코 순탄치 않았지요.
작가로 성공하기 전, 이혼 후 어린 딸을 홀로 키우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우울증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완성한 원고는 여러 출판사에서 번번이 거절당했고요. 현실은 그가 기대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선택은 무의미했지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만으로는 문이 열리지 않는 세상이었던 겁니다.
인생은 내가 만난 세상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만난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따라 다시 만들어지지요.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지.” “아이를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잘 키워야지.” 처음에는 부모가 아이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면 아이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아이 역시 하나의 수상한 세계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성향이 있고, 관심이 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길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요. 그때 부모가 배워야 하는 건 아이를 완전히 바꾸는 방법이 아닙니다. “주어진 관계 안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화하며, 어떻게 함께 성장할 것인가”이지요.
아이도 부모가 선택한 조건이 아니고, 부모 역시 아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관계는 현재의 상호작용 속에서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좋은 인생은 세상과의 더 나은 상호작용에서 열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 역시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한 가지 기술을 익히면 오랫동안 그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요. 지금은 새로운 기술과 도구를 배우지 않으면 바로 도태되는 시대입니다. 이처럼 산업이 변하면 일의 기회도 달라지고, 조직의 기준이 바뀌면 인정받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어떤 시대에는 오래 버티는 성실함이 중요한 가치였다면, 어떤 시대에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 사람과 협력하는 능력,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원하지 않은 업무를 맡았다고 가정해볼까요.
처음에는 불만이 생깁니다. “왜 하필 나일까?”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데.” 그 마음은 당연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길 바라니까요. 하지만 이미 주어진 조건이라면 질문이 달라져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왔을까?”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뭐지?”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지?” “이 조건 안에서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치는 뭐지?”라고 물어야 합니다.
세상을 통제하려 할수록 우리는 더 쉽게 흔들립니다. 세상은 원래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믿는 순간, 이해보다 원망이 앞서지요. “왜 저 사람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까?” “왜 세상은 이토록 불공평한가?” 결국 남과 세상 탓만 합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조건을 계속 붙잡고 원망하는 것만으로는 현재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순간,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작은 가능성까지 놓치게 됩니다.
세상을 조건으로 바라본다는 건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지요. 즉 내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분한다는 뜻입니다.
조건은 주어지지만 관계는 지금 만들어진다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볼까요.
“왜 내 인생인데, 내 뜻대로 안 되는 걸까?”
내 인생인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태어난 조건, 지나간 시간, 타인의 마음은 아무리 애써도 내 뜻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무엇을 선택할지는, 지금도 여전히 내 뜻대로 바꿔갈 수 있는 영역입니다.
부모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달라질 수 있지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을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지는 달라질 수 있고요. 타인의 마음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어떤 태도로 다가갈지는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시대의 변화 역시 막을 순 없습니다. 그 변화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움직일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요.
좋은 날씨만 있는 여행이 아름다운 여행이 아니듯, 인생도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갈 때만 의미 있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비가 내리고, 계획했던 길이 막히고,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하는 겁니다.
세상은 주어집니다. 그리고 주어진 세상과의 상호작용은 현재에서 일어납니다. 과거의 기억이 불안을 만들 수 있지만, 현재의 나는 그 불안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제약을 줄 수 있지만, 현재의 나는 그 안에서 가능한 선택을 찾을 수 있고요. 타인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지만, 현재의 나는 그 반응에 어떻게 응답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인생은 좋은 조건만 주어진 인생이 아닙니다. 주어진 세상과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인생입니다. 과거는 오늘의 조건을 만들지만, 오늘의 상호작용은 내일의 가능성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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