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으로 푸는 경영, HR(인사), 사람, 인생 전문 칼럼

욕망 | 인생을 빚는 보이지 않는 손

Written by 자인플랫폼_민의진 | Feb 28, 2024 6:24:37 AM

고궁 주변 어느 수제비집 앞이 복작복작합니다. 긴 처마 아래 사람들이 앞뒤 간격을 지키며 줄지어 서 있습니다. 말 잘 듣는 아이들만 따로 모아 놓은 듯 줄이 나란하네요. 맛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식당 풍경이 대개 이렇지요. 때를 불문하고 문 앞이 시장을 이루다시피 합니다.  

 

배만 채우겠다면 굳이 이런 집을 찾지 않겠지요. 저마다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겁니다. 우선 맛, 그러니까 수제비는 원래 내가 좋아하고 지금 당긴다는 거지요. 같은 수제비라도 내게 더 맛있는 이 집 수제비여야 하고요. 아직 먹어보지 못해 궁금해할 수도 있겠네요. 또는 추억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제비는 대표적인 추억의 별미입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귀중한 한 끼였지요. 물론 지긋지긋했던 궁핍을 떠올리기 싫어 부러 피하는 부류도 있을 겁니다. 한편 편승도 있겠네요. 남들 다 먹으니까 나도 먹는다는 거지요. 더 나아가 질투 때문이기도 합니다. 너도 먹었는데 나만 못 먹으면 억울하지요. 아마도 인터넷 어딘가 전시된 누군가의 행적을 보고 약이 올라 찾아온 이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경우 배고프기보단 배가 아파 긴 줄에 가담하는 셈이지요. 비 오는 날이라면 그저 비가 와서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비 오는 날엔 수제비가 제격이라는 무의식이 발동하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먹는 것 하나 고르는 일도 참 쉽지 않습니다. 기억과 감정이 마구 엉켜 있으니 말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것은 ‘허기’의 줄입니다. 기차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먹고 싶다’ 혹은 ‘먹고 만다’ 하는 ‘욕망의 기차’ 말입니다. 

 

 

줄을 서는 목적을 우리가 잘 쓰는 ‘행복’이라는 말로 뭉뚱그려볼까요? 그렇습니다. 행복을 바라는 마음, 즉 ‘욕망’이 줄을 세우는 것입니다. ‘추구(追求)’의 줄이지요. 욕망은 배고파서 아무거나 먹으면 해소되는 ‘욕구’와는 좀 다릅니다. 욕망은 특히 좋고 싫음의 감정이 묻어 있는 ‘가치기억’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뇌가 학습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대개 좋았던 기억이 추구하게 만들고, 안 좋았던 기억은 회피하게 만듭니다. 피하는 것도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니 추구의 일종이지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순간도 추구를 멈춘 적이 없습니다. 여기 기차에 오른 이들은 비교적 욕망에 솔직한 사람들입니다. 그 누구보다 더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추구의 전형들입니다. 

 

 

요즘 일본에서는 노인들의 일상이 담긴 짧은 시를 모은 책이 인기입니다. 노인들 스스로 노인의 욕망과 고충을 익살스럽게 표현하지요. “연상이/내 취향인데/이 없어”, “연명치료/필요 없다 써놓고/매일 병원 다닌다”, “당일치기로/가보고 싶구나/천국에”와 같이 다양한 애환이 농담처럼 넘쳐납니다. 웃을 일만은 아니지요. 우스우면서 슬픕니다. 고충 이전에 욕망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니까요. 아홉 개를 가지면 한 개를 채워 열을 구하고, 열을 채우면 그 배인 백을 바라는 것이 사람의 욕망입니다. 천국에서도 더 나은 천국을 기대할 겁니다. 이렇게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이 세상에는 욕망을 버린 순진무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조건을 지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세상에 반응해야 하고, 신경이 이 일을 주도합니다. 인간이 진화해온 역사는 바로 ‘신경(神經)’ 진화의 역사인 것입니다. 간단하나마 신경 작용의 바탕이 되는 규칙을 보면, ‘자극(예측)판단(반응)행동’ 순입니다. 뇌의 활동은 외부 자극을 받아들여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측하는 과정에는 무의식과 의식이 모두 관여하죠. 자극이 입력되면 뇌는 관련 기억을 인출하여 자극의 가치를 예측하고, 그 가치에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합니다. 가치가 없으면 뇌는 반응하지 않겠죠. 이것은 곧 ‘가치’ 추구의 알고리즘이고, 이 과정에서 신경적 보상이 주어졌을 때 만들어진 ‘기억’이 바로 ‘욕망’입니다. 즉 욕망의 본질은 기억입니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납니다. ‘울음’은 갓 난 아이에게 첫 숨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의 생명 현상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지요.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생물이고 동물입니다. 일단 살아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가 바로 ‘항상성(恒常性)’입니다.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며 스스로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숨을 쉬어야 하는 겁니다. 또한 울음은 ‘바람’입니다. 일체라고 여겼던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숙명적으로 ‘결핍’이 시작됩니다. 반사적이나마 먹을 것과 안전한 손길을 바라는 본능적 신호를 내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생명을 가진 존재는 ‘결핍’과 그 불완전한 해소의 양태인 ‘행복’ 사이에서 늘 위태롭습니다. 불안하고 고독하지요.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고독하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섭기까지 하지요. 오죽하면 철학자 하이데거는 ‘내던져졌다’고 했을까요! 그렇다고 빈방에 들어앉아 그 이유를 궁구하고 있을 수만 없습니다. 관계해야지요. 불교에서 중시하는 ‘참선(參禪)’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禪’을 보면 示(보일 시)와 單(홀 단)이 결합합니다. ‘혼자 본다’는 거지요. 혼자 있을 때 누구를 볼까요? 바로 자기 자신이겠지요, 인간이겠지요. 즉 참선은 번뇌를 끊고 홀로 인간과 진리를 탐구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훌훌 속세를 벗어나 혼자가 되면 일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안심(安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로우면 다시 고독해지는 게 실상입니다. 혼자 있는 건 실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홀로 있을 때 초연하기는 더더욱 어렵고요. 그런 사람이라면 그가 선승이게요. 그래서 하이데거가 또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빠져 있다’고요. 욕망에 휩쓸리는 것이지요. 온전히 혼자 있지 못해 욕망하고, 서로의 욕망이 교차하며 사건이 일어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끔은 행복 가끔은 고통이 생겨나고, 그것을 기억하지요. 한마디로 우리는 ‘인연(因緣)’을 지으며 사는 것입니다. 인연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너와 나의 욕망이고요. 우리는 하나 가진 것 없이 왔기에 애초에 결여와 결핍의 상태였고, 그것을 채우려고 하니 욕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일부 부모들 사이에서 ‘우리 애가 결핍이 없어 걱정’이라는 말이 돕니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나태를 가져와 걱정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말은 은근한 자기 과시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저 좀 있어 보이니까 남의 말도 내 말처럼 내뱉는 건 아닌지! 단순히 물질적 가난과 정서적 소외만이 결핍인 게 아닙니다. 딱히 규정하기 힘든 이 근원적 결핍의 기억은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모자라고, 끝끝내 이대로 사람은 죽습니다. 

 

 

욕망은 인생을 빚는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보이지 않아서 무섭긴 하지요. 욕망은 상호작용을 추동하며 인생의 변화와 성장을 이끕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작용을 통해 그 존재와 현상이 드러납니다. 인간 역시 유기질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을 얻은 존재입니다. 유구한 세월 속에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진화해오며 여기까지 왔고요. 우리 모두 각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상호작용하며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이기적 존속 추구를 기본으로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성장과 정신적 완성까지 차츰 다른 차원의 욕망이 생겨납니다. 그에 따라 또 다시 상호작용하며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생입니다. 즉 인생은 세상과 상호작용한 결과입니다. 세상과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쌓이면 행복한 인생이, 부정적인 상호작용이 쌓이면 불행한 인생이 만들어지겠지요. 요컨대, 우리의 몸도 마음도 성공도 행복도 인생도 모두 세상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인생이 상호작용인 이유는 세상의 본질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은 인생을 가동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욕망은 그저 두 얼굴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을 옥죄는 덫이 되기도 하니까요. 욕망이 가진 ‘비의(秘議)’지요. 사실 인간은 욕망의 덫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욕망에 취약합니다, 욕망으로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불교에서는 ‘삼독(三毒)’을 경계합니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 이 세 가지지요.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욕심(貪)’이라는 독입니다. 욕망의 추구가 원활하지 못할 때, 서로의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욕망은 욕심으로 변질됩니다. 이 가시지 않으니 노여움이 생겨나고 결국 평정심을 잃은 채 어리석은 판단을 합니다. 욕심에 짓눌 ‘이젠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다’며 과부하에 빠지고,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손상됩니다. 새삼스럽게 욕망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과 욕망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어느 신부의 이야기를 떠올려봅니다. 그는 의대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신부가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교수 일을 마친 뒤 지금은 농부로 삽니다. 그의 어머니는 소위 ‘헬리콥터 맘’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무조건 의사가 되라고 했습니다. 동생 역시 명문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어머니가 바라던 바였지요. 그런데 동생은 합격을 확인한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동생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엄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의대에 합격했어요. 이제 됐죠?’ 동생은 단 한 번도 의대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욕망은 좀 특별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납기까지 합니다. 어머니는 배 속에서 생명을 품고 수개월을 지냅니다. 자식에 대한 애착이 본성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지요. 애착이 집착의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걸 분별하지 않고 통째로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앞서 봤듯 인간은 누구나 결핍을 안고 태어납니다. 또 결핍은 욕망의 바탕이 됩니다. 그 욕망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요. 그래서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도 잘 모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언제나 현실과 괴리가 생겨납니다. 그 때문에 고통과 불안이 찾아오고요. 꼭 권력 투쟁과 같은 거창한 것만 욕망인 게 아닙니다. 아무리 소소해도 그 욕망은 영원히 살 것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욕망은 그 속성상 결코 충족될 수 없으니까요.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충족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어르신 한 분이 수제비집에서 나옵니다. 여전한 줄을 보고 놀라는 눈빛입니다. 그제야 남들의 욕망을 자각한 듯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기운이 빠지거나 몸이 처지면 아이 적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을 찾습니다, 기억합니다. 그 맛을 다시 느끼며 살아가는 힘과 의욕을 회복하지요. 바라건대, 어르신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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