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넘치는데, 왜 나의 세계는 좁아질까?
유튜브에서 러닝 영상을 몇 편 보면 러닝화와 훈련법이 마구 쏟아집니다. 정치 영상을 몇 개 보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 편인 것처럼 보이고요. 늘 내가 좋아할 만한 것만 족집게 도사처럼 소개합니다. 참 친절하지요.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우리를 성실하게 섬기는 비서인 셈입니다.
추천 알고리즘은 우리가 오래 머물거나 반복해서 선택한 정보의 패턴을 학습해, 비슷한 콘텐츠를 더 자주 보여줍니다. 그러다 보면 익숙한 관심사와 관점은 더욱 뚜렷해지고, 다른 생각을 만날 기회는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이야기에 지치기도 하지만, 알고리즘은 쉬지 않고 우리의 다음 선택을 예측하지요.

우리는 인터넷이 세상을 넓혀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손안의 작은 화면 하나로 과거 인류의 지식은 물론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십억 명의 생각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인터넷은 점점 넓어지는데, 정작 우리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터넷은 세계로 열린 창이면서 동시에 나를 비추는 거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수한 사람과 정보를 만나기 위해 들어가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주치는 것은 이미 익숙한 나 자신이니까요. 세계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미 믿고 있던 것만 되풀이해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추천 알고리즘이 하는 일은 사실 새로운 발명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 스스로 해오던 일이지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 인간의 오래된 특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세상을 ‘무보정’으로 본 적이 없는 겁니다.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이 겹겹의 필터를 통과한 뒤에야 하나의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이렇게 형성된 인식의 틀을 ‘프레임’이라 부릅니다. 프레임은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면서 복잡한 현실을 빠르게 해석하기 위한 생존 도구입니다. 그 덕분에 새로운 일을 만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지름길인 셈입니다.
같은 현실도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현실을 각자의 언어로 번역해 이해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 나의 프레임을 거쳐 해석된 현실에 가깝습니다.
확증편향, 가장 익숙한 착각
프레임이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각자의 경험만큼 서로 다른 해석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오히려 다양한 관점은 한 사람의 프레임만으로는 보지 못했던 세상의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자신도 하나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시작됩니다. 프레임을 통과한 해석을 수많은 해석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라고 믿는 순간, 내 관점과 ‘다른’ 생각들을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 아니라 ‘틀린’ 생각으로 여기게 됩니다.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프레임은 이후에 무엇을 보고 믿을지에도 영향을 줍니다. 내 생각에 맞는 정보는 쉽게 눈에 들어오고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반면, 내 생각과 다른 정보는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대수롭지 않게 처리됩니다.
그렇게 선택된 정보는 처음의 판단을 확신으로 바꾸고, 굳어진 믿음은 다시 자신에게 맞는 정보만 찾아 나섭니다. 프레임이 세상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옳다는 증거를 모으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존의 판단에 맞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것을 흔드는 정보는 축소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을 ‘확증편향’이라 부릅니다.
확증편향은 거창한 신념이나 사회 문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때도 신나게 활개를 치지요.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고 믿기 시작하면 무심한 한마디는 호감의 신호가 되고, 석연치 않은 행동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기대에 맞는 장면은 크게 보이고, 그렇지 않은 장면은 슬쩍 지워지는 것이지요. 특히 썸을 타는 시기와 연애 초반은 거의 뇌의 망상 대회에 가깝습니다. 콩깍지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뇌가 발행한 가장 관대한 면죄부 같지요.
그렇다면 왜 내 생각에 맞는 정보는 쉽게 믿고, 그것과 다른 정보는 불편하게 느낄까요?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아무런 기준 없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 감정과 가치가 함께 만든 프레임을 통해 해석하지요. 이미 가진 생각과 잘 맞는 정보는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그것을 흔드는 정보는 기존의 이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듭니다. 내 생각을 바꾸려면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기존의 생각과 잘 맞는 정보에 더 쉽게 끌립니다.
판단의 과정 또한 이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보를 접할 때 익숙함이나 호감, 불편함 같은 정서적 반응과 이성적 검토를 함께 거칩니다. 이성이 자신의 첫 판단을 점검하고 다른 근거까지 살피는 데 쓰이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판단에 이유를 붙이는 데 쓰이면 확증편향은 오히려 더 정교해지지요.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자신이 편향되어 있다고 느끼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은 객관적인 근거를 따르고 있고, 오히려 상대가 감정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합니다. 확증편향은 단순히 고집을 부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가진 믿음에 맞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것을 흔드는 정보는 축소하거나 밀어내면서 자신의 판단을 계속 유지하는 과정이지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보다, 기존의 믿음에 맞게 세상을 선택적으로 편집하는 것입니다.
확증편향은 세계를 좁히고 갈등을 키운다
자기 생각에 맞는 정보만 계속 쌓이면 얼핏 근거가 많아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점점 더 확신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근거 자체가 자기 프레임에 맞춰 선택된 것이라면, 확신이 커지는 만큼 이해도 깊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명은 늘어도 이해의 폭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근거가 쌓일수록 편향이 더 정교해지기도 하고요.
확증편향은 생각을 단단하게 만드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 프레임에 맞지 않는 현실을 잘라내며 세계를 좁힙니다. 확증편향이 무서운 이유는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세상에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믿는 순간부터 창을 열지 않고도 세상을 다 본 것처럼 행동하지요.
세상은 여전히 넓습니다. 다만 내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을 뿐입니다. 확증편향은 우리를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편안한 안락의자를 하나 내어줍니다. 그 의자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아는 것은 늘어가지만, 바라보는 세계는 점점 좁아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더 좁은 세계를 더 큰 확신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본 것이 진실이고 상대의 관점은 틀렸다고 믿으면 대화는 쉽게 싸움이 됩니다.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판단하면서, 자신은 진실을 말하고 상대는 그것을 왜곡한다고 느끼기 때문이지요.
정치와 세대, 조직과 관계의 갈등도 이 구조와 연결됩니다. 나와 같은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은 내 편이 되고, 내 프레임을 흔드는 사람은 불편한 사람이 됩니다. 상대의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상대를 판단하고, 논리를 살피기 전에 진영이나 태도부터 봅니다. 무엇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를 함께 살피려던 대화는 어느새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싸움으로 바뀌고 맙니다.
합리적 객관, 더 넓은 세계를 만나는 방법
물론 인간이 자신의 주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 감정과 가치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객관적인 판단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다른 관점과 검증 가능한 근거를 통해 판단을 계속 수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객관, 곧 ‘합리적 객관’입니다.
합리적 객관은 주관이 전혀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더 타당한 근거가 나타나면 판단을 기꺼이 고쳐나가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처음부터 편향되지 않는 사람보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알고 계속 확인하는 사람이 합리적 객관에 더 가까운 것이지요.
이때 ‘메타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메타인지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 과정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합니다. 내가 어떤 정보에는 쉽게 끌리고 어떤 정보에는 불편함을 느끼는지, 지금 사실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내린 결론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지요.
합리적 객관은 이런 성찰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때 시작됩니다. 내 생각을 지지하는 정보뿐 아니라 그것을 흔드는 정보도 함께 살펴보고,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의 관점을 경청해야 합니다. 불편한 정보와 마주쳤을 때는 곧바로 밀어내기보다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 물어야 하고요. 판단을 지키는 것보다 판단을 검증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증편향에 빠지면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하나의 이야기로 축소합니다. 하나의 사실이 믿음과 맞아떨어지는 순간, 마치 퍼즐이 완성된 것처럼 안도하지요. 단순한 설명은 이해하기도 쉽고 마음도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명이 단순하다고 해서 언제나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의료계에서는 환자의 여러 증상을 가능하면 하나의 진단으로 설명해보려는 원칙이 강조되곤 합니다. 이른바 ‘오컴의 면도날’이지요. 여러 설명이 가능하다면 불필요한 가정이 적은 쪽부터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복잡한 문제의 핵심을 찾는 데 유용한 원칙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면 단순한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 설명이 놓치는 것은 없는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때 떠올릴 만한 것이 ‘히캄의 격언’입니다. “환자는 원하는 만큼 많은 질병을 가질 수 있다”는 말처럼 현실에는 여러 원인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에도 경험과 감정, 처한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하나의 사건 역시 여러 조건이 맞물려 일어납니다.
오컴의 면도날이 가장 단순한 설명부터 살펴보게 한다면, 히캄의 격언은 하나의 설명만으로 현실을 재단하지 않도록 붙잡아줍니다. 단순한 설명부터 검토하되 다른 가능성을 성급히 잘라내지 않는 것, 현재의 판단을 믿되 새로운 근거가 나타나면 다시 수정하는 것. 이 균형이 합리적 객관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내가 믿고 싶은 가장 단순한 이야기인가?”
내가 본 것과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생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가능성이 들어올 자리가 생깁니다. 합리적 객관은 나의 관점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관점 너머까지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의 시야가 넓어질 때 나의 세계도 함께 넓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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