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물질과 유전체로 작동하는 존재라면,
고유한 유전체와 경험이 만드는 가능성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몸도 책상이나 돌멩이처럼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 황과 같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체의 차이는 특별한 재료보다 이러한 물질이 어떻게 조직되고 작동하는지에서 나타납니다. 합성 유전체와 동적 평형에 관한 논의는 생명이 물질의 관계와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며, 인간을 물질로 설명하는 것과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생명체의 형태와 기능은 유전자 목록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유전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어떤 유전자를 언제, 어디서, 얼마나 사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세포와 조직이 만들어집니다. 수정란이 복잡한 생명체로 자라는 과정은 완성된 청사진을 펼치는 일보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종이를 접는 일에 가깝습니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체가 매우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 역시 유전자 목록뿐 아니라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복잡한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의 유전체는 감수분열과 염색체 교차, 세대마다 생기는 새로운 변이를 통해 사실상 반복되기 어려운 조합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유전체만으로 인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뇌의 신경세포들은 경험과 학습을 거치며 연결되고, 그 연결망 속에서 기억과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유전체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고유한 유전체가 품은 가능성과 그것이 환경·관계·교육 속에서 발현되는 과정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강연 목차
- 물질과 유전체로 이루어진 생명의 구조
- 유전자 발현 조절이 만드는 세포의 차이
- 유전정보의 사용 순서가 만드는 종의 차이
- 생기론과 기계론으로 바라본 생명의 본질
- 합성 유전체로 구현한 생명의 작동
- 창발성과 동적 평형으로 이해하는 생명
- 감수분열이 만드는 염색체의 조합
- 교차와 변이가 만드는 유전체의 다양성
-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변이의 의미
- 유전체가 제공하는 가능성의 범위
- 경험과 학습이 만드는 뇌의 연결
- 교육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정체성
1. 생명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명체의 차이는 유전자 목록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유전자를 사용하는 시점과 위치, 순서를 정하는 조절 정보가 복잡한 생명체를 만듭니다.
생명체의 재료는 무생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 황 같은 원소가 분자와 거대분자, 세포와 조직을 이룹니다. 이것이 생명체의 하드웨어라면 유전체는 이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입니다. DNA의 정보는 RNA를 거쳐 단백질로 이어지고, 단백질은 세포 안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유전체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목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유전자가 언제 어디서 발현될지를 조절하는 정보도 넓게 분포합니다. 유전자 주변의 조절 부위와 여기에 결합하는 단백질은 어떤 유전자를 언제 작동시킬지 조절합니다. 같은 유전체를 지닌 세포가 신경세포나 근육세포처럼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생명체의 형태는 유전자 목록을 그대로 펼친 결과가 아니라, 그 정보를 서로 다르게 사용한 결과입니다.
유전체를 ‘청사진’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완성된 종이학의 설계도보다 종이를 접는 순서가 실제 형태를 만드는 데 중요하듯, 수정란이 자랄 때도 어떤 유전자가 언제, 어디서 작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체가 약 98.7% 유사하고 유전자 목록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유 역시, 몇몇 유전자의 차이뿐 아니라 비슷한 유전정보가 사용되는 시점과 위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어떤 유전자를 가졌는지만이 아니라, 그 정보가 사용되는 시점과 방식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2. 물질에서 생명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생명이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생명이 단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질이 관계와 질서를 이루며 자신을 유지할 때 생명의 성질이 나타납니다.
과거에는 생명체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생기론이라고 합니다. 반면 기계론은 생명 현상도 물질의 구성과 작동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19세기 프리드리히 뵐러가 생명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여겨졌던 유기물인 요소를 실험실에서 합성하면서, 두 영역 사이에 절대적인 경계가 있다는 생각도 흔들렸습니다.
생명체를 원소 단위로 분해했다가 원래의 구조대로 재조립했을 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묻는 사고실험은, 생명에서 중요한 것이 재료인지 배열과 작동 방식인지 살펴보게 합니다. 2010년 크레이그 벤터 연구진은 세균의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해 다른 세균의 세포에 넣었고, 합성 유전체의 지시를 받은 세포는 분열하며 증식했습니다. 세포 전체를 처음부터 만든 것은 아니지만, 합성한 유전정보가 기존 세포의 작동 체계와 결합하면 생명 현상을 이끌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할 때 개별 원자에는 없던 물의 성질이 나타나듯, 생명도 물질이 특정한 관계와 질서를 이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성질을 드러냅니다. 생명체를 이루는 분자는 계속 교체되지만 전체적인 형태와 기능은 유지됩니다. 따라서 생명은 고정된 물질의 집합이라기보다, 외부와 물질을 주고받으면서도 내부의 질서와 기능을 유지하는 동적 평형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복잡성은 특별한 재료보다, 평범한 물질들이 관계를 이루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납니다.
3. 단 한 번뿐인 유전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감수분열과 교차, 변이는 저마다 다른 유전체를 만듭니다. 그 가능성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므로 현재의 능력이 한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유전체는 대부분 같지만 약 0.1%가 다릅니다. 이 차이는 서로 다른 염기의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들어질 때 23쌍의 염색체에서 하나씩 선택된 23개가 각 생식세포에 들어갑니다. 이 조합만으로도 정자와 난자는 각각 약 800만 가지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둘의 결합까지 고려하면 수정란의 조합은 수십조 가지에 이릅니다.
감수분열에서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한 쌍의 염색체가 일부 구간을 서로 교환해 새로운 조합을 만듭니다. 이와 별개로 DNA 복제 오류나 X선 같은 방사선, 자연스러운 화학적 변화로 정자나 난자로 이어지는 세포에 새로운 변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와 신생아의 유전체를 함께 비교하면 아이에게 새로 생긴 변이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염색체의 조합과 교차, 새로운 변이가 겹치면서 각 사람은 사실상 다시 반복되기 어려운 유전체를 갖게 됩니다.
변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땀샘과 유선 발달에 영향을 주는 변이는 한 환경에서는 불리하더라도 다른 환경에서는 생존과 적응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냥보다 생각에 몰두한 사람이 공동체의 보호 속에서 살아남아 훗날 아인슈타인과 같은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고실험도 이를 보여줍니다. 유전체의 고유성이 존엄성을 직접 증명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현재의 기능과 효용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합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이 존엄성의 근거 자체는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현재의 능력과 효용만으로 한 사람을 재단하는 태도에 제동을 겁니다.
4. 유전체만으로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유전체는 가능성의 조건일 뿐 완성된 인간의 모습은 아닙니다. 경험과 학습,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신경 연결망은 기억과 정체성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유전체는 신체의 특징과 능력에 영향을 주지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미리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타고난 조건이 중요하다는 관점과 경험을 통해 사람이 형성된다는 관점은 오래 대립해 왔습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으로 인간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유전체는 여러 가능성과 경향을 제공하고, 그 가능성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지는 성장 과정의 환경과 경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은 많은 신경세포를 갖고 태어나지만 세포 사이의 연결까지 완성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듣고 움직이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동안 뇌의 신경세포들은 새롭게 연결되고, 자주 사용하는 연결은 강화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억과 학습, 행동 방식이 형성됩니다. 교육은 이미 완성된 능력을 밖으로 꺼내거나 지식을 일방적으로 채워 넣는 일이 아니라, 타고난 조건이 다양한 경험과 만나 새로운 능력으로 발전하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유전체가 가진 가능성은 가족과 공동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배움과 반복적인 실천은 뇌의 연결을 계속 변화시키며 한 사람의 기억과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존엄성이 특정한 유전자나 뛰어난 능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생물학은 사람을 유전자나 현재의 능력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며, 각자가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동등하게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유전체나 현재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존중은 각자가 경험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조건을 함께 지키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