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람의 정체성(正體性, iden- tity)을 묻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 혹은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를 의미하지요.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살펴보는 이유는 간명합니다. 교육의 주체도 객체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로봇을 만들어내고 우주여행까지 할 수 있을 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했지만, 인간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나’라는 존재가 과거의 수많은 우연과 기회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고 있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는 그러한 선택들에 책임을 지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도 강조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들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나’역시 과거의 결과입니다. 현재의 나는 우주의 시원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 동안 형성된 결과들이 누적된 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무수한 시간의 층들이 켜켜이 쌓여 현재의 우리가 된 것이지요.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며, 절대자가 흙으로 빚어낸 존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수십억 년에 걸쳐 자연이 빚어낸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매우 낯설게 들릴 수 있겠지만,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명이 첫 기지개를 켜던 시절에 우리는 작은 세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작은 유기물질 덩어리였고, 또 그 이전에는 우주를 떠다니던 먼지와 같은 물질의 입자였습니다. 인간의 물질적 나이는 무려 138억 년에 이르고, 생물학적 나이도 38억 년이나 됩니다. 우리가 거쳐온 진화의 시간이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물질, 생명, 인간, 사회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라는 이치’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죠.
무슨 지하철 노선도 같습니다만, 138억 년 전 빅뱅에서부터 현대까지 빅히스토리(big history) 관점에서 인간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한 도표입니다.
도표에서 보다시피 우리는 까마득한 과거를 가로질러 빅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결과이고, 현재의 세상도 역시 과거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간 정체성에 대한 답도 같은 시계열적 맥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도표는 인간 정체성의 계층적 창발 이벤트를 인과맥락적으로 정리한 빅히스토리이자 빅픽처인 셈입니다.
도표를 보면 항상성, 복잡계, 창발, 자유에너지와 같은 어려운 단어들도 보이지만, 한편에는 행복, 성장, 역량, 인생, 성공과 같은 친숙한 단어들도 보입니다. 무척 복잡해 보이지만, 이 단어들의 본질적 속성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바로 ‘질서’입니다. 삶이란 생명 질서의 생성과 자기 축적의 과정이고, 죽음이란 생명 질서 해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이유는 생명 질서의 발현을 위한 에너지 수급 과정이고,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항상성 질서를 위한 자기 질서 강화의 과정입니다. 결국 인간 정체성의 역사는 질서의 창발, 적응, 축적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 정체성의 기반은 ‘질서’이고, 그 질서가 추구하는 것은 ‘가치’입니다. '가치’는 ‘생명 정체성’의 다른 표현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비롯하여, 선악을 포함한 생명윤리 문제부터 오늘 강연의 화두인 교육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든 가치의 바탕에는 인간 정체성이 자리합니다. 우리가 인간 정체성의 본질을 파고드는 이유는 우리 삶과 사회에 중요한 ‘가치’의 기준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현상은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창발된 질서입니다. 그래서 ‘질서=관계×관계’입니다. 여기에서 곱하기(×)는 상호작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생명을 얻고, 환경과의 적응적 상호작용을 통해 의식을 가진 사회적 동물로 지금까지 진화해 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현재의 나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 사회 또한 사람 간의 상호작용으로 창발된 집단입니다. 이는 ‘나=나×세상’과 ‘사회=사람×사람’이라는 관계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생 역시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통한 상호작용 결과가 쌓여서 만들어지며, 이는 ‘인생=나×세상’이라는 관계식으로 설명됩니다. 사람의 몸도 마음도 성공도 행복도 인생도 모두 세상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고, 인간으로 태어나, 현재 존재합니다. 오늘 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도 바로 ‘상호작용’입니다. 교육의 핵심도 다름 아닌 인간과 환경의 긍정적 상호작용을 돕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 =사람×환경’입니다.
약 10만 년 전만 하더라도 지구에 다양한 호미닌(hominin)이 살았던 것을 알고 계시나요? 호미닌은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사촌쯤 된다고 할 수 있는데요. 지금은 그들 모두 사라지고 화석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약 3만 년 전까지 호모사피엔스와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은 짧은 기간에 지구에서 사라졌습니다.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단일종으로 지구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인류가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인 셈이지요. 호모사피엔스는 어떻게 약 20여 종의 호미닌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오늘날과 같은 문화와 사회를 탄생시키고 인류의 번성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일까요?
수만 년간 현생인류와 공존하며 구석기시대를 함께했던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된 이유는 고인류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여겨지는 듯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적은 호모사피엔스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으며, 근육질의 크고 단단한 몸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네안데르탈인은 정교한 석기 제작 기술로 날카로운 돌칼과 창을 만들어 사용한 매우 뛰어난 사냥꾼이기도 했다지요. 이러한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신체적으로 훨씬 열악한 조건을 가졌던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네안데르탈인의 멸종과 관련된 여러 학설 가운데 ‘집단 문화 선택설’이 있습니다.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에 비해서 열악한 신체 조건과 사냥 실력을 지녔기 때문에 일대일(1:1)로 싸운다면 무조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럿이 집단을 이루어 다대다(N:N)로 싸우게 되면 호모사피엔스가 더 유리했기 때문에 그들은 단독 사냥이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집단 사냥을 해야 했습니다. 집단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가 필요했을 테고, 협력을 통해서 집단 시너지를 만들어내야 할 필요도 있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현생인류는 빠르게 문화적 진화를 이루었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더 커졌을 집단 시너지를 통해 불리한 신체적 조건을 극복하고 네안데르탈인보다 우월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합니다.
집단 문화 선택설의 관점에서 보면,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요인은 발달된 사회적 뇌를 바탕으로 하는 ‘집단 시너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집단 시너지를 매개하는 것은 ‘상호작용’입니다. 내부 개체들의 상호작용 없이는 집단 시너지가 만들어지지 않지요. 인류의 조상이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사회적 뇌는 더욱 발달했을 것이고, 발달한 사회적 뇌는 다시 결속력을 강화하고 상호작용을 통해 집단 시너지를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눈치’, 어떤 반응을 해야 상호작용의 결과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를 현명하게 파악하는 ‘재치’, 그리고 자신의 반응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고려하고 좀 더 친사회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염치’와 같은 능력도 사회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체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과 관련된 뇌신경 회로들, 특히 ‘메타인지’와 관련된 신경회로들이 강화되면서 호모사피엔스의 상호작용 능력은 더욱 향상되었을 것이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타인지와 상호작용 능력의 차이가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와의 집단 문화 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관계로 연결된 존재로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메타인지’ 덕분입니다. 생각에 대한 생각 혹은 인지에 대한 인지라고 할 수 있는 메타인지는 나와 타인을 구분하여 사회적 ‘관계 의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를 나라고 인식할 수 있어야 나와 타인을 구분하고 타인을 타인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인식할 수 있어야 관계라는 개념이 생기고, 관계를 통해 가치를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를 인식할 수 없었다면 조상들은 집단 시너지를 낼 수 없었을 것이고 자연 선택의 예리한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메타인지는 사회적 관계를 매개함으로써 우리가 개인을 넘어 인류로 도약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생각에 대한 생각이자 인지에 대한 인지로서 ‘고차인지’라고도 할 수 있는 메타인지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인지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각, 지각, 생각이라는 내면의 인지 작용을 느껴서 아는 상태가 의식인데, 이 의식을 마치 연극 공연의 관객처럼 제3자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조절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바로 메타인지입니다. 메타인지는 우리의 자기 인식, 전략적 사고 과정, 타인과의 소통 및 상호작용 등에 개입해서 제어자의 역할을 하며, 메타인지의 개입 결과는 다시 의식에 영향을 미쳐 인지적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합니다.
메타인지의 역할과 가치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메타인지 덕분에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고 가치를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타인과 상호작용할 때 상대의 관점에서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 것’은 메타인지의 첫 번째 가치입니다. 그다음 우리는 메타인지 덕분에 미래를 상상하고 예측하며 전략적으로 가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가치 있는 성과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인과적 예측을 바탕으로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메타인지의 두 번째 가치입니다. 또 우리는 메타 인지 덕분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합리적으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이면서 합리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은 메타인지의 세 번째 가치입니다.
더 나아가서 메타인지의 이러한 세 가지 기능은 각각 대인관계 (타인), 가치 관계(성과), 자아 관계(자신)에서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호작용의 대상은 크게 ‘타인, 성과, 자신’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음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하는 모든 상호작용은 세 가지 대상과의 범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집단은 개인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결은 언제나 관계를 부추기고 집단을 도모합니다. 집단의 힘은 개체들의 상호작용에서 나옵니다. 상호작용이 문화와 문명을 빚고 개체보다 강한 인류 사회를 만듭니다. 인류가 개체를 넘어 집단과 집단을 아우르며 시너지를 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상호작용 덕분입니다. 인간은 상호작용을 통한 집단 시너지를 통해서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물론 다른 동물도 상호작용을 하고 집단을 이루어 생활합니다. 다만 오직 인간만이 메타인지라는 고차원의 인지 능력을 통해서 훨씬 더 복잡하면서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눈부신 문화와 문명을 일궈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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