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대칭의 미래 | 본성과 양육의 기묘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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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의 미래 | 본성과 양육의 기묘한 관계

서울 올림픽공원은 시민의 휴식처입니다. 산책로를 따라 예술 작품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중 ‘올림픽 1988’이라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하늘로 치솟는 좌우 대칭 은빛 반구들이 인상적이지요. 올해가 용의 해라 그런지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각가 문신은 이처럼 생명체를 닮은 ‘대칭’을 파고들어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생전 한 인터뷰에선 ‘소꼬리’를 들어 대칭이 아니라 ‘다름’을 설명했습니다. 소 엉덩이에 파리가 앉으면 그쪽으로만 소가 꼬리를 쳐서 한쪽이 닳는다고요. 우리 인생도 움직이는 방향과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성장 과정에서 신체부터 성격까지 변화와 차이를 보입니다. 문신의 작품도 얼핏 보면 일란성 쌍둥이 같은데, 이를 알았는지 완벽한 대칭이 아닙니다. 좌우에 미묘한 차이가 있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어 주변 풍경이 투영되는 게 특징입니다. 이는 그가 창조한 생명체의 무한한 성장과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한마디로 작품에 ‘생명감’을 불어넣었던 거지요. 그러면서 우리 인간 역시 ‘결정’된 게 아니라 ‘변화’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교육의 관점에선 이처럼 변하는 대칭을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의 기묘한 관계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유전과 환경의 영향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해볼 수 있는 거지요. 

 

사람은 태어나면 처음엔 거의 똑같습니다. 하지만 각자 다른 환경에서 세상과 관계하며 달라집니다. 누워 마냥 울기만 하다가 엄마 아빠를 향해 서서히 기어가며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아이가 한창 자라는 와중에 엄마 아빠는 가끔 레고 블록을 밟아 눈물이 찔끔하는 일도 벌어지지요. 이처럼 혼자 걷다가 나란히 걸으며 서로 주고받는 관계로 변하는 게 인생입니다.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고 다른 사회까지 견문을 넓혀가며 저마다의 길이 생겨납니다. 그 길을 따라 표현하고 행동하고 공감하며 성장하고요. 그 과정이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닙니다. 매 순간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상호작용을 하며 그저 습관을 들이는 일이지요.

 

 

그런 점에서 인간을 탄생시킨 것은 ‘자연’이지만, 인간을 키우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태어나서 수시로 변화하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차츰 학습하고 적응함으로써 미성숙한 존재에서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유전적 영향이나 생물학적 특성은 ‘타고나는’ 부분에 해당하므로 ‘만들어지는’ 측면에서 보자면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경험을 하는가’가 그 사람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도 우리가 태어나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며 진정한 인간다움을 획득하는 과정 자체가 ‘학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실질적인 주체가 다름아닌 우리의 ‘뇌’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약 8600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신경세포는 수백 조 개에 이르는 시냅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뇌의 신경세포를 뉴런(neuron)이라 부르고, 뉴런과 뉴런을 연접하는 부위를 시냅스(synapse)라고 합니다.  

 

신생아의 뇌는 성장 과정에서 신경세포 간 시냅스가 연결되면서 질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시냅스도 양적으로 충분히 생성된 후 질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지요. 모두가 알다시피 뇌가 크다고 해서 반드시 지능이 우수한 것은 아닙니다. 신경세포의 수는 모든 사람이 비슷합니다. 뇌의 성능을 결정하는 것은 ‘연결성’입니다. 뇌가 성숙한다는 것은 신경세포의 연결성이 강화되고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영유아기에 신경세포의 연결성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뇌가 성숙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인류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생물학적 유전자를 ‘타고나는’ 동시에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따라서 신경세포의 연결이 강화되면서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어떤 환경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신경경향성을 형성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마치 식물의 잎과 줄기가 빛의 방향으로 반응하고 뿌리는 그 반대로 구부러지듯 말입니다. 식물에겐 그게 타고난 ‘결’이자 살아갈 ‘길’인 셈이지요. 이처럼 환경과 상호작용한 경험을 내면에 기억으로 축적하는 일 모두 ‘학습’입니다. 축적한 기억을 바탕으로 다시 수많은 선택과 경험을 하며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요. 즉 성장이란 상호작용을 통한 바람직한 변화 과정이고, 그 변화를 이끄는 두 동력이 유전과 환경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그 본질적 속성에서 비롯되어 드러납니다. 속성을 알면 아무리 복잡한 현상도 단박에 꿰뚫을 수 있지요. 교육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교육의 방향을 알려줄 열쇠도 본질에서 찾아야 합니다. 나무의 열매는 다름 아닌 ‘씨앗’ 속에 있었습니다. 그 씨앗이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교육도 그래야 합니다. 씨앗의 본질을 알고 그 결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길을 내주고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거지요. 물론 씨앗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환경이 안 좋으면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신경과학자 리사 배럿은 유전과 환경의 관계를 ‘탱고를 추는 연인’으로 빗댔습니다. 그만큼 서로 깊게 얽혀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겁니다. 특히 인간의 뇌를 ‘양육해야 할 본성’이라고 표현했지요. 다시 말해 씨앗과 환경은 상호작용적 관계이지 결코 이분법적 관계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건 바로 ‘상호작용’입니다. 상호작용이 없다면 유전도 환경도 무의미합니다. 심지어 생명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집니다. 우리 몸만 해도 매 순간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령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상호작용을 합니다. 교감신경은 위급한 상황에서 심장박동을 늘립니다. 반면 부교감신경은 혈압을 낮추고 심장박동을 늦춥니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장의 움직임은 느려지고,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장 운동을 촉진합니다. 이른바 ‘길항(拮抗)’이라는 상호작용으로 우리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거지요. 그 덕분에 우리 생명이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고요. 

 

 


 

 

교육에서도 의미 있는 상호작용 없이 의미 있는 배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옛 성현들은 ‘학습관행(學習慣行)’을 강조했습니다. ‘학습’은 배운 것을 정리하고 재해석하고 가공하는 일입니다. 책만 읽고 마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덧붙여 독후감이나 서평을 쓰듯 말입니다. 이렇게 배운 것을 ‘관행’ 즉 마음에 새겨 실제 행동으로 옮깁니다. 결국 배운 것이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질 때 공부가 된 것이고 성과가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은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지식을 얻고 발전시키며 성장합니다.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능력이야말로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고요. 요즘처럼 정보가 폭발하고 정답이 없는 시대에 이런 능력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기존의 지식을 수집만 하는 배움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거라면 로봇이 훨씬 더 잘해내지요. 이제 우린 지식의 소비자가 아닌 지식의 창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질문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태도를 갖춰야 합니다. 마침 여기저기에 질문의 창이 활짝 열리고 있습니다. 요즘 눈길을 사로잡는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도 그중 하나입니다. 질문하고 답변하는 방식이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에서 추론으로 추론에서 비판으로 이어지는 인지 성장의 과정이 대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요. 서로 묻고 답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거지요,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세계를 차례차례 깨고 거듭나는 겁니다. 

 

인류는 ‘교육’이라는 제도를 발명해 사람의 성장을 돕는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신경과학 측면에서도 교육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더 잘하도록 뇌의 기능과 성능을 발달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의 본질은 관계이며 상호작용입니다. 특히나 사람은 사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이고요. 모든 일은 관계 맺기에서 출발하고, 교육 역시 사람 간 관계 맺기에서 시작됩니다. 그 관계 속에서 다양한 기억과 감정을 주고받으며 ‘인생’이라는 저마다의 궤적이 남습니다. 세상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고 인간으로서 유대감을 형성하는 무한의 교실인 겁니다. 그만큼 건강한 상호작용으로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긍정으로 도전하고 성공으로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는 그런 교육 환경 말입니다. 

 

문득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하이라이트가 떠오릅니다. 아이 하나가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그 장면. 정적 속에 전 세계의 눈이 아이를 따라갔고 묵직한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한편으론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해 애가 타기도 했지요. 굴렁쇠를 놓치거나 넘어지지 않길 바라며 두 손 모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아이는 굴렁쇠를 멈추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우리는 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사실 아이가 실수했어도 우리는 응원의 박수를 보냈을 겁니다. 아이는 우리의 희망이자 우주의 미래였으니까요. 그 후 아이는 더욱 힘차게 굴렁쇠를 굴렸고, 그 순간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나오며 축제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출처 : 자유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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