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칼럼

소통 | 겨울 숲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인생 칼럼

소통 | 겨울 숲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겨울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서둘러 숲을 찾았습니다. 아직 겨울 숲입니다. 숲의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야 했습니다. 지난겨울 얼어붙은 숲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람쥐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높고 곧게 뻗은 참나무 아래였습니다. 겨울에 다람쥐를 보니 좀 놀랐습니다. 겨울잠을 자야 할 때 활보하는 다람쥐가 신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다 잠에서 깼고 배가 고팠겠지요. 겨우내 먹으려고 지난가을 숨긴 도토리를 찾는 중이었을 겁니다. 다람쥐는 한동안 두리번거리다가 재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무심한 눈망울이 아직도 선합니다. 혹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그때 참나무를 찾았습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과 처음 만난 곳에서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사랑했던 사람이겠지요. 그 사람이 올 때까지 며칠이 지나도 계속 그 자리를 맴도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증상’이라고도 하겠지만 꽤나 낭만적이지요. 반면 애통한 기다림도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 만났던 곳도 잘 잊지 못하지만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곳도 잊기 힘듭니다. 아이를 놓쳐 잃어버린 부모의 애절한 마음! 아이를 잃어버린 그곳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그걸 단서로 이리저리 찾아 나서지만 결국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옵니다. 평생 그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절을 떠나 숲은 생명의 거처입니다. 온갖 나무와 꽃과 짐승과 곤충이 짝짓고 먹이를 찾으며 치열하게 생존하는 곳이지요. 그런데도 그 치열함에 비하면 무척 고요합니다. 생물학자 마들렌 치게는 숲의 고요를 거두고 숲속 생명들의 대화를 엿듣습니다. 자연의 질서에 공감하며 자연의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쓴 책 제목처럼 ‘숲은 고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시끄럽다’고까지 하지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공존’을 위해 활발히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이들도 ‘소통’을 하는 것이지요. 소통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닌 겁니다. 자연이 그토록 무정(無情)해 보여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숲에는 각종 소리와 냄새, 발자국, 배설물과 같이 생명이 남긴 흔적들이 있습니다. 숲속에 남아 있는 산란한 흔적들, 그 흔적들이 곧 메시지인 거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호작용으로 뇌에 남은 신경 흔적이 ‘기억’이 되고, 그 기억으로 우리는 또다시 소통합니다. 

 

 

 

 


 

 

최근엔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흔합니다. 소통을 위한 편의와 재미까지 갖춰졌지요. 그런데도 소통은 늘 어렵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십중팔구는 소통 문제로 귀결됩니다. 각자 경험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면 기억이 다르고, 기억이 다르면 생각도 달라지니 그럴 수밖에요. 조직 구성원과의 관계는 물론 가족관계에서도 소통에서 오는 애로를 토로합니다. 사소한 오해와 갈등이 불씨가 되어 큰 화를 초래하는 경우가 심심찮습니다. 개인 간 다툼, 조직 간 알력, 국가 간 분쟁이 대개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무심히 내보인 말과 몸짓 하나가 관계에 파국을 가져옵니다. 조직 내 불통을 방치하거나 소비자와 소통을 멈추면 기업 자체가 사라지기도 하고요. 

 

소통은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입니다. 생명체가 소통을 하는 건 존속에 유리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소통은 존속의 성공과 실패와 직결되어 있지요. 우리는 소통에 필요한 다양한 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가 대표적이고요. 그런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해도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한 반응도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측면에선 인간의 언어가 완전히 유용하다고 보기 힘듭니다. 세상과 언어가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지요. 여기에 기분이나 분위기도 더해집니다. 표정 역시 그렇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나 생각 때문에 머리가 더 복잡해집니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통화하는 사람을 제삼자가 보면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 상대가 있고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텐데 말이지요. 누구나 ‘소통’을 한다지만 양쪽 모두 일방적인 것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 할 얘기만 다 하면 소통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지요. 

 

 

 

 

소통 과정에 작용하는 변수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날의 날씨나 컨디션도 소통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 상대의 기억과 감정 상태처럼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변수들도 많죠. 내가 아무리 좋은 소식을 전해도 상대의 기분이 안 좋다면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소통하는 나는 상대의 반응에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극을 접할 때마다 나의 배경 정서를 바탕으로 기억을 떠올려 생각하고 표현합니다. 상대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이성적으로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준 자극과 자신의 배경 정서로부터 활성화된 기억, 그리고 실시간으로 구성된 감정이 언어와 표정이라는 매개를 통해 소통하는 겁니다. 

 

 

사실 소통은 의식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소통은 내 기억이 상대의 자극에 의해 순환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두 개의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듯, 나의 감정이 그를 자극하고 다시 그의 반응이 나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것은 감정을 에너지로 일어나는 자극과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소통은 상대가 주는 자극을 매개로 나의 기억 속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로, 그는 그의 이야기로 소통합니다. 나는 나의 기억이고, 그는 그의 기억으로 각자의 기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 기억으로 만들어진 ‘나’라는 개념과 ‘그’라는 개념이 서로의 자극을 매개로 소통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소통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기억의 소통 이면에 ‘감정’까지 더해집니다. 감정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며 의식을 조정합니다. 의식은 감정의 표상일 뿐이지요. 의식적으로 소통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무의식의 감정으로 소통하는 겁니다. 이쯤 되니 조금 무기력해지지요. 하지만 일상의 고통스러운 이슈들이 이런 감정에서 비롯되는 게 실상입니다. 감정이 격해진 바람에 한참 지난 일까지 들춰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부부 싸움은 흔합니다. 감정을 앞세워 후회하기 일쑤이고요. 그렇다고 감정 없는 로봇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혹여 감정이 없어진다면 그 기억은 무엇일까요? 인간적인 의미는 하나 없는 경험의 끝없는 레퍼토리일 뿐이겠지요. 기억 없는 감정은 또 무엇일까요? 욕망의 이런저런 대상 사이에서 얄팍하게 날아다니는 것에 불과하겠지요. 감정이 없으면 우리 심장은 부서지지 않고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력을 느끼고 잠시라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의 풍요로운 기억은 존재하지 않겠지요. 

 

인간의 반응이 무의식적 감정에서 오는 거라면 소통을 위한 의식적 노력은 무소용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제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더 나은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소통으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긍정적 기억이 쌓여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승려 법정은 일생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했습니다. 여기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걸 갖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소통’에도 해당합니다. ‘무소통(無疏通)’ 즉 소통하되 불필요한 소통은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특히 감정을 앞세운 소통은 삼가야 합니다. 법정은 ‘마음의 거리’ 또한 당부했습니다.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서지 말자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고유의 간격을 잊지 말자는 겁니다. 그 간격은 서로 차분하게 호흡하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할 수 있는 ‘여지(餘地)’인 셈이지요. 막무가내로 뻗치는 기억과 감정의 소리를 다스리며 잠재우는 겁니다. 

 

 

 

 


 

 

겨울 숲은 울창하진 않지만 산뜻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헐벗었지만 염결하고 세상사와 달리 단순합니다. 이따금 부스럭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합니다. 신중하게 걷다 보면 마음 깊숙한 데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머리가 맑아집니다. 자연이 주는 평온이 즐겁습니다. 하지만 ‘고요하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숲의 생명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 중심의 편견일 뿐이지요. 숲이 건네는 신호를 못 알아듣고 못 알아채는 겁니다. 사람 간 소통에서 흔히 그러하듯 말입니다. 

 

겨울 숲에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날 리 없습니다. 하지만 ‘투둑, 투두둑’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우린 기억합니다. 그것의 신비롭고 정겹고 평온한 느낌도 잊지 못합니다. 다람쥐 역시 그 소리를 기억하겠지요. 비록 기억의 소리나 환각일지라도 즉각 반응해야 합니다. 아무렴, 밥인데요. 겨울 숲에서도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과 감정으로 남아 있으니 언제 들려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길고 긴 울음을 남긴 채 쫓기듯 총총 사라집니다. 

 

 

 

 


모든 콘텐츠는 제공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거 무단 전재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이전화 아이콘 이전화 다음화 다음화 아이콘

평점은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입력하시겠습니까?

글이 도움이 되셨나요?

회원가입

준비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