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칼럼

자아 | 중력을 거스르는 아름다운 안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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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 중력을 거스르는 아름다운 안간힘

약동의 계절입니다. 기온도 날마다 오릅니다. 나무에는 물이 차오르고요. 봄을 뜻하는 영어 ‘spring’에는 ‘튀어 오르다’, ‘용수철’, ‘샘물’ 같은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모두 싹이 돋듯 ‘솟아오른다’는 의미이지요. 인간이 스스로 솟구치는 방법은 ‘점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점프하며 사진을 찍고는 합니다. 요즘처럼 벚꽃 흩날리는 시절에는 ‘벚꽃 점프’가 만발합니다. 발에 스프링이라도 단 듯 가장 높이 튀어 오르며 행복의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사진가 필리프 홀스먼은 ‘점프’ 사진으로 유명합니다. 유명인들의 점프 사진이라 더 유명하지요. 동시대 개성 있는 인물의 점프 요점만 포착한 그의 사진은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점프’란 스스로 몸을 날려 높은 곳으로 오르는 동작입니다. 감히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지요. 그는 이런 찰나의 몸짓과 표정에서 ‘진짜’가 드러난다고 봤습니다. 점프 동작에 ‘자아’가 드러난다는 거지요. ’점프학’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새로운 심리학 분야 같지요. 실제로 사진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면 저마다 개성이 넘칩니다. 점프는 순간이지만 영원 같은 시간과 무의식이 카메라에 잡힌 거지요. 

 

왕비가 된 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점프는 그야말로 고상하고 기품이 느껴집니다. 비운의 소설가 로맹 가리는 매우 비장한 표정으로 점프했고요. 배우 마릴린 먼로는 다리를 뒤로 구부렸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속물적이고 성적인 이미지와는 다릅니다. 단정하게 점프하며 본래의 얌전하고 지적인 성향을 드러낸 거지요. 정장 차림의 키스 맥휴나 하워드 번 같은 경영인들은 다소 뻣뻣하지만 두 팔을 치켜들며 최대한 높이 뛰어오르려 했습니다.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강단 위에서 원자 폭탄 터지듯 솟구쳤고요.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자기 펀치에 자기가 놀란 듯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점프는 그중에서도 유별납니다. 약간 연출되긴 했지만 그의 작품처럼 초현실적이지요. 큰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캔버스도 의자도 붓을 든 그 자신도 공중에 떠 있습니다. 길게 끼얹은 물줄기와 던져진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말입니다. 마치 그의 꿈과 무의식 속에서 유영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환상적입니다. 점프 사진을 넘어 또 하나의 ‘초현실주의 사진’이 탄생한 셈이지요. 

 

달리의 점프 사진처럼 우리 안에도 여러 자아가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들은 결코 평화롭지 않습니다.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지요. 기억은 기억대로 욕망은 욕망대로 저마다 자아를 자칭하며 매일 싸우고 삐치는 겁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지요. 우리의 기억과 욕망은 우리 안에 다양한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게다가 기쁨과 활력, 슬픔과 불안, 초조함과 쓸쓸함 따위의 감정들도 동시에 천방지축 날뜁니다. 그러니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중인격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란한 봄 날씨 같지요. 봄비가 내려 싹이 돋고 꽃이 피다가도 난데없이 거친 바람이 불어닥치는 것처럼 변화무쌍합니다. 봄이 오면 의료계에선 ‘스프링 피크(spring peak)’를 경계하라고 당부할 정도입니다. 이는 봄철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살률마저 높아진다고 하니 봄은 누군가에게 진정 ‘잔인한 계절’인 겁니다. 생명의 시작과 활기가 넘치는 봄에 믿기 어려운 역설이지요. 

 

 


 

 

아무튼 봄은 점프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누구나 한 컷 정도 점프 사진을 가지고 있겠지요. 홀스만의 사진처럼 점프는 자신을 드러내는 몸짓입니다. ‘나의 점프’도 결국 ‘나의 기억’에서 비롯되고요.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학습한 나에 대한 기억이 모두 모여 나의 정체성을 이루니까요. 그 기억으로 나는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가 다시 현재의 나를 만들고요. 현재의 나는 과거가 만든 나입니다. 인생이란 과거를 바탕으로 또 다른 나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인 셈이지요. 과거는 그 말의 뜻과 달리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반과거(半過去)’ 시제가 여전히 우리 곁을 배회합니다. 우리는 엄연히 기억 속에서 삽니다. 기억이 보여주는 세상에서 꿈 꾸고 사랑하며 살아가지요. 이 세상은 우리 뇌가 재구성한 일종의 ‘소설’입니다.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경험과 학습으로 쓰인 ‘자전소설’이고요. 그 소설 속 주인공이 바로 ‘나’인 겁니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과 학습이 끊임없이 기억으로 편입되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흐르는 강물처럼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서 인생이라는 ‘이야기’가 완성되고요. 인생 모두가 저마다 멋진 ‘대하소설’인 겁니다. 아무리 소소해도 우리의 경험과 학습이 기억되어 과거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현재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흐르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 미래도 사라지고요. 현재를 기억할 수 있어야 과거와 미래도 존재합니다. 

 

 

 

 

목재소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꽤 크고 싱싱해 보이는 나무도 막상 재목으로 쓰기 위해 켜보면 속이 텅 비었거나 구멍이 나 있는 경우가 많다고요. 언뜻 보면 단단해 보이지만 겉만 살아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속 빈 나무’인 셈이지요. 나무가 목재로 쓸모가 있으려면 겉은 볼품없어도 속이 꽉 차 있어야 합니다. 목재소 사람들은 이걸 나무의 ‘품격’이라 하더군요. ‘아름다움’의 가치를 넘어 ‘쓸모’까지 갖춰야 비로소 품격 있는 나무가 되는 겁니다. 목재소 사람다운 말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건 아무리 함께 나고 자랐어도 나무마다 그 ‘속’이 다르다는 겁니다.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이지요. 나무 전체에 골고루 영양분을 퍼뜨렸을 때 비로소 ‘속’이 굳고 단단한 목재가 되는 거고요. 나무의 현재로 나무의 과거를 상상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 역시 세상에 태어나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미래의 ‘나’를 축적합니다. 그 특성이 내면에 구축되면 ‘성격’이 되고, 외면적 성향으로 드러나면 ‘인격’이 됩니다. 성격은 감정 경험이 쌓여 만들어지고, 인격은 감정 표출을 제어하는 특성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엄마 배 속에서부터 시작해 지금 이 순간까지 다채로운 경험과 학습으로 만들어진 기억과 경향성이 지금의 나를 만듭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짚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인간의 초능력(!)을 발휘하자는 뜻이지요. 발목이 부러져 꽤 오랫동안 깁스를 하고 풀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합니다. 예전처럼 바로 걷기가 힘듭니다. 아팠던 기억에 짓눌려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다친 발을 더 쓰며 힘을 실어야 회복이 빨라집니다. 안 그러면 계속 약해지게요.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바탕이지만,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봄이 오면 겨우내 닫았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새로운 공기를 받아들이며 ‘환기’해야 합니다. 계절의 순환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시인 김영랑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 했습니다. 슬프고 절망적인 봄 속에서 기쁘고 희망하는 봄을 본 것입니다. 역설의 절창이지요. 봄이 그렇듯 ‘점프’ 역시 슬프지만 찬란합니다. 중력의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맨몸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아름다운 안간힘이니까요.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이지만 그 속에 우리의 진심을 담으니까요. 점프는 잠시나마 우리의 ‘가면’을 벗기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스스로 무장 해제하여 자유롭게 확장하는 순간인 거지요. 봄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봄을 핑계 삼아서라도 스프링, 우리 모두 점프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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