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칼럼

부캐 | 사랑보다 내가 더 소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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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 | 사랑보다 내가 더 소중한 사람

번뇌 왕자 햄릿이나 낭만 기사 돈키호테만큼은 아니지만 시라노도 꽤 알려진 캐릭터입니다. 시라노 드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1897년에 초연된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작품이지요. 시라노의 록산느를 향한 사랑 이야기는 연극뿐 아니라 영화나 뮤지컬로도 각색되어 여전히 큰 감동을 안깁니다. 가슴 터지도록 사랑하고픈 계절무드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지요. 

 

 


 

 

시라노는 당대 최고 검객이자 시인입니다. 무략과 문식을 다 갖추었지요. 그런 그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코가 너무 크고 못생겼지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짝사랑하는 록산느 앞에 그랬고요. 콧대(?)가 너무 높으면 오히려 아지는 걸까요! 스스로 사랑의 자격을 의심합니다. 

 

끓는 마음에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연애편지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발신인이 다릅니다. 그의 동료 크리스티앙도 록산느를 좋아하는 걸 알고 그를 대신해 사랑의 밀어를 담은 편지를주지요. 크리스티앙 잘생긴 얼굴 뒤에 자신못생긴 코를기는 겁니다. 번듯한 생김새에 비해 글솜씨도 말솜씨도 엉망이었던 크리스티앙도 시라노의 재기 뒤에 자신의 무식을 숨겼고요. 

 

록산느도 사실은 시라노가 써준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읽으며 둘 중 누군가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렇게 사랑, 아니 슬픔(?)의 삼각형이 완성되지요. 크리스티앙은 결국 록산느가 진정 사랑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시라노임을 깨닫고 죽습니다. 록산느는 수녀원에 은둔하고요. 시라노 역시 록산느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슬프다 못해 처절하지요. 

 

 


 

 

이 트리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률 백퍼센트를 자랑하는 ‘연애조작단’ 영화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연애에 서툰 고객의 의뢰에 따라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모든 상황을 연출하며 사랑을 성공시키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에이전시가 굳이 필요 없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을 것도 없이 분신술이나 둔갑술을 펼치듯 이곳저곳에 전혀 다른 ‘나’를 만들어 동시에 존재하고 사랑하니까요. 

 

이젠 콤플렉스만 숨기는 게 아니라 아예 캐릭터 전부를 바꿔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상을 만들고 그 상에 맞게 행동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사랑의 감정마저 생산해내는 신통력을 발휘하고요.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속 얘기만이 아닙니다.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누구인지 물으면 ‘일명(aka)’을 붙여 자신을 소개하곤 합니다. ‘일인다역(一人多役)’이 우리의 존재 양식이자 존재 기술이 된 겁니다. 

 

 

예전엔 무대 위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페르소나’라 불렀습니다. 현대의 페르소나는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반응하며 겉으로 내보이는 자아를 뜻하지요. 사실 진짜 자아를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남에게 약점이 될 만한 자아를 숨기고 사회생활에 적합한 가면을 쓰는 게 편하지요. 시라노가 못생긴 코를 숨기고 크리스티앙이 엉망인 글솜씨와 말솜씨를 숨겼듯 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 가면이 준비되어 있지요. 편의대로 선택만 하면 됩니다. 그러고는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관계를 맺지요. 하나의 자아로는 해내기 힘든 여러 상황을 손쉽게 해결하는 겁니다. 심리학자 칼 융 페르소나는 한 개인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돕는 매체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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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부캐(부수적 캐릭터)’라는 말을 더 자주 씁니다. 주로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다가 사회 전반으로 개념이 확장되었습니다. 덩달아 캐릭터 산업도 호황이고요. 이런저런 캐릭터에 자아를 투영시켜 분신처럼 여깁니다. 현실의 코스튬플레이도 흔해졌고요. 그야말로 부캐가 현현하는 시대인 겁니다. 그러면서 본캐와 부캐의 경계도 점차 희미해지고요. 가상 현실이 실제 현실을 닮아가는 게 아니라 실제 현실이 가상 현실을 닮아가는 꼴이지요. 

 

 


 

 

인간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다 다릅니다. 능력도 필요도 욕망도 다 다릅니다. 욕망만 해도 한 가지 색이 아닙니다. 하나의 양상일 수 없고요. 좋다 나쁘다 따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 경험은 복잡하고 역동적입니다. 인간이 온전한 존재일 수 없지요. 그런데 한 인간이 인간 전부를 반영하고, 한 인간이 인간 전부를 대표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다 연결되어 삽니다. 연결되려면 변신해야 하고요. 요즘같이 급변하는 시대 더더욱 필요합니다. 어찌 보면 변신이야말로 성장의 징표일지 모릅니다. 나와 세계의 연결을 확장시키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변신과 연결이 가능한 건 우리 뇌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늘 변화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지요. 일이 벌어지거나 기회가 주어지는 때 상황에 맞춰 부캐를 연기하며 변화를 이끕니다. 그러면서 점차 ‘사회적 뇌’로 진화하고요. 사회를 지향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 행복해진다는 걸 아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감정을 느낄지 보다 적극적으로 헤아리는 거지요. 

 

 

결국 ‘나’는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공동으로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하나의 자아가 있을 수도 없지만, 하나의 자아로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하나의 정체성에 ‘올인’할 수 없는 겁니다. 하나의 관계가 무너지면 모두 무너지는 셈이니까요.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유연한 자아가 필요합니다. 자아의 ‘복잡성’이야말로 축복이자 나를 지키는 카드입니다.  

 

 

흔히 인생을 연극에 비유합니다. 린 모두 배우지요. 관객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연과 조연과 단역 구분 없이 각자의 역할이 있는 배우들입니다. 기가 맡은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려 애쓰는 배우처럼 매 순간 인정받 사람이 되고 싶지요. 이 사회도 우리의 이런 욕망과 연기에 의해 유지될 수 있는 거고요. 

 

 

 

 

살다 보면 인생이 꽉 막히고 답답한 때 옵니다. 이때 세상과 얼마나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문제는 관성의 힘이 크기 때문에 결심만으로 과거의 습관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거지요. 어쩔 수 없이 행동 나서야 하고 이럴 때 ‘부캐’ 전략이 도움이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 거의 다가 훌륭한 ‘부캐’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캐로 사회적 연기를 하며 살아가지요. 말하자면 탁월한 ‘배우’인 셈입니다. 또 유능한 ‘연출’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제 자기의 역할을 하도록 진두지휘하지요. 비극 주인공에 머물지, 아니면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될지 스스로 각본을 짜는 겁니다. 그 구성에 맞춰 연기고요.

 

인생에 답은 없습니다. 늘 변하기 때문에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응도 잘하고 성과도 좋습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설렘 속에 사는 겁니다. 결국 인생은 변화이니까요. 변화와 성장을 향해 가는 여정이니까요. 

 

 


 

 

사실 록산느는 자신이 진정 사랑한 편지 속 영혼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라노는 끝끝내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죽습니다. 사랑 고백커녕 뜬금없이 ‘깃털(panache)’을 지키겠다는 말만 남기지요. 이 ‘깃털’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당시 깃털 장식은 ‘신분’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명예나 자존심으로 보는 쪽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시라노에게 소중했던 건 결국 ‘사랑’보다 ‘나’였던 겁니다. 끝까지 고정된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지요. 자신이 다칠까 두려웠던 겁니다. 절반의 사랑이지요. 

 

사랑보다 내가 더 소중한 사람이 이런 짝사랑을 합니다. 온전한나’를 고집하는 게 허영’입니다. 라는 못난 그놈을 쪼갤 줄 알아야 사랑도 합니다. 부캐의 세계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능성 열어보라는 거지요. 사랑도요. 그래서 시라노의 마지막 대사가 못내 아쉽습니다.

 

은 축복처럼 오지만 결코 평온하 않습니다. 완벽한 봄은 없지요.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을 놓 후회합니다. 그렇게 봄날은 고요. 이렇게 미처 말하지 못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고백하라고은 또 옵니다. 사랑을 바로 말할 당신은 이미 당신 안에 있습니다. 사랑이 되는 봄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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