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칼럼

기억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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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3월 28일~3월 14. 인터넷에서 본 어느 전시회 기간 정보입니다. 좀 이상하지요. 처음엔 눈을 의심했습니다. 물이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흐르는 듯 보였으니까요. 나 다시 돌아갈래 하며 기억을 좇는 여정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역시 날짜가 뒤바뀐 거습니다. 잠시렇게 있다가 잘못을 알아챘는지 바로 수정되어 있더군요. 3월 14일~3월 28일.

 

이 전시회 작가는 현대인이 바쁘게 살아가며 놓친 일상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것을 ‘여향(餘香)’이라 했고요. ‘남아 있는 향기’라는 뜻이지요. 그림을 그리고 남은 물감을 뜻하는 ‘여적(餘滴)’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실수의 흔적이 더 재밌게 느껴집니다. 이걸 본 사람들의 잔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요. 담당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 작가의 마음은 또 오죽할까요! 담당자는 너무 바쁜 나머지 꼼꼼하지 못했을 겁니다. 주변 사람들도 일일이 챙길 겨를이 없었겠지요. 하지만 다음번엔 틀림없을 겁니다. 아찔했던 기억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테니까요. 언젠가 이런 해프닝이 작가에겐 작품의 소재가 될 거고요.

 

 


 

 

영화나 드라마에선 이처럼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도 여든으로 태어나 열여덟이 되어간다면 인생은 무척 행복할 거라고 했지요. 이 말에 영감을 받은 또 다른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흐르는 인생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고요.

 

하지만 현실에서 시간은 순리를 어기지 않습니다. 또 지나간 날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역류할 수 있는 방법은 고작 ‘회상(回想)’뿐입니다. 가령 지금 여기서 그때 그 사람을 ‘상기(想起)’하는 거지요. 어느 노랫말처럼 떠나버린 그 사람이 생각날 뿐, 그 사람 곁에서 걸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회상이고, 그것도 그나마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겁니다. 기억 덕분에 ‘환상(幻想)’도 만들어내고요. 기억된 상이 이래저래 조금씩 변하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기억은 어떤 자극을 받을 때 활성 상태에 있던 뉴런들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회상은 그와 비슷한 자극이 입력될 때 관련 뉴런들이 다시 활성화되는 걸 말하고요. 기억이란 뉴런과 그 연결 지점인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변화겁니다. 경우의 수는 우주의 별처럼 무궁무진합니다. 중첩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회상이란 과거로 돌아간다는 개념일 뿐, 그때와 똑같은 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나 역시 변해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도 기억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물론 기억은 과거의 것입니다. 지금의 기억은 과거의 결과지요. 현재 시제로 의식하지만 실상 과거의 기억을 지금 재생하는 겁니다. 신경과학자 제럴드 에델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기억된 현재’ 표현했습니다. 의식이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 시제에 재구성된 거라는 의미지요. 그러니 어제까지의 세계란 없는 겁니다. 어제는 어디로 가버린 게 아니라 오늘을 사니까요. 현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겁니다. 우리의 기억 고정불변할 수 없는 이유 이 때문이고요. 한마디로 우리 뇌는 시간의 흐름과 나를 둘러싼 환경에 끊임없이 변화를 주는 창조자인 셈입니다.

 

 


 

 

 

 

우리는 옛사랑을 닮은 그림자만 봐도 뜨거웠던 사랑의 시절을 떠올립니다. 미련과 회한이 남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람도 사랑도 변하는 게 이치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뇌 과학자들은 기억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피는 데 초점을 모으는 참입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는지 묻는 이들에게 답을 찾아주는 것과 같지요. 

 

사랑의 원리는 만나고 떠나는 것에 있습니다. 불교 식으로 말하면 ‘회자정리(會者定離)’지요.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겁니다. 세상사 어떤 것도 원리를 거스르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진상은 좀 다르게 믿으려고 합니다. 마치 불치의 병이라도 앓는 듯 너도나도 ‘못 잊어’ 합창하지요.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해도 누구나 공감해주는 겁니다. 사랑의 종료로 느끼는 아픔과 상실감을 표현한 예술 작품도 넘쳐납니다. 우리의 기억이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연인 간 사랑만이 아닙니다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고국인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지요. 그의 작품에는 러시아 특유의 멜랑콜리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 동네에서 들었던 성당의 종소리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이런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겁니다. 하지만 조국을 잃자 음악적 영감도 잃었습니다. 결국 향수병과 우울증을 앓다 생을 마감했지요.  

 

 

기억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선택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음악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음악도 결국 뇌의 작용인 겁니다.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모두 기억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기억이지요. 그래서 시간이 떠난 자리에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남습니다. 사진이 남습니다. 그림이 남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을 남깁니다. 

 

 

우리는 각자 만든 기억의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기억이 없으면 인식도 없고, 인식이 없으면 존재도 없습니다. 기억은 경험과 학습으로 인식된 상황 그리고 그와 관련한 감정이 함께 스며든 겁니다. 기억이 다르면 개념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체성을 말할 때 ‘나는 나의 기억’이고 ‘너는 너의 기억’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가 폴 세잔이 빅투아르 산을 반복해서 그린 것도 그 산이 매일 다르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도 다르게 보이는데 내가 본 산과 다른 사람이 본 산은 얼마나 다를까요! 어찌 보면 사랑도 기억이 만든 가상의 개념인지 모릅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기억수인(囚人)’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러니 종종 세상을 보는 방식의 합리성에 스스로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봄날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를 본다면 움직이는 건 바람도 버들가지도 아닙니다. 나의 눈과 뇌가 그 상을 만들었으니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이 움직이는 거지요. 선문답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이해합니다. 뇌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이지요. 그리고 감각과 생각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인식합니다. 인식은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반응입니다. 인식이 세상을 받아들여 기억을 만들고, 그 기억을 통해 다시 나를 포함한 세상을 인식하는 겁니다. 

 

 


 

 

인생이란 한 사람이 세상에 와서 겪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남긴 흔적 여향 그 사람의 인생이 됩니다. 평생 동안 남긴 자취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결과를 알지 못하면 인생을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나와 타인의 기억 속에 새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게 사랑의 상처입니다. 또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게 사랑의 미로이고요.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 인상적인 대사가 나옵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집착으로 엉거주춤하는 주인공에게 던지는 충고였지요.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잊히는 것까지 감당해야 다 큰 사람이지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다들 자기만의 시간 혹은 사랑의 개념이 있을 겁니다. 화가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는 그와 단 7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랑에 혹자는 70년을 함께 살았다면 단 7초도 그리워하지 않았을 거라며 농담을 던지기도 하지요. 작가 피천득은 그의 수필집 『인연』에서 그리워하는 사람 아사코를 세 번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거라고 합니다. 이런 사랑에 혹자는 낭만을 깨는 게 아쉬운지 네 번째 만나면 또 다를 거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두 인연 모두 인생을 좀 살아본 어른의 감정이 서려 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못 잊으면서 못 만나고 혹은 안 만나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사랑은 ‘필패(必敗)’합니다. 그런 사랑의 미완마저 감싸는 자기만의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그 상처를 치유할 또 다른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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