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퇴고와 성장 | 메타인지를 깨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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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와 성장 | 메타인지를 깨우세요

글을 쓸 때 꼭 해야 하는 일이 ‘퇴고’입니다. 글을 고치고 다듬는 과정이지요. 당나라 한 시인이 시어를 ‘밀다(推)’로 할지 ‘두드리다(敲)’로 할지 두고두고 숙고한 일에서 유래했습니다. 목수가 나무를 깎듯 더는 깎을 수 없을 때까지 깎는 거지요. 더는 고칠 수 없을 때까지 글을 살피고 또 살피는 겁니다. 

 

 

 

 

퇴고를 할 때면 지남철마냥 떨리기 마련입니다. ‘이게 맞나?’ 자문하며 자꾸 주춤하지요. 그만큼 절실합니다. 퇴고를 거듭할수록 글이 나아질 거란 기대 때문이지요. 작가 이태준도 글은 고칠수록 좋아진다 했습니다. 이걸 ‘글의 법칙’이라 했고요. 글은 나무와 달리 물성이 없어 무한히 깎을 수 있습니다. 퇴고는 끝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완성된 글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셈이지요. 모두 ‘초고’와 다름없습니다. 

 

 


 

 

인간은 인생을 돌아볼 줄 아는 존재입니다. 결코 살아지는 대로 살지 않지요. 그래서도 안되고요. 스스로 인생을 개선해 나갑니다. 퇴고하듯 말입니다. 퇴고는 글쓰기를 넘어서는 과정입니다. 사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듯 글을 쓸 수 있지요.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퇴고는 이런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하는 일입니다. 스스로를 부정하지요. 따끔한 자기 비판이 따라옵니다. 무척 고통스럽지요. 퇴고를 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퇴고도 상호작용입니다. 글을 쓰는 이와 읽는 이의 상호작용이지요. 당장 읽는 이가 안 보여도 의식하며 고쳐 나가야 합니다. 인지 기능과 관련된 신경회로들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지요. 글의 최종 효용을 염두에 두고 인과적 예측을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효과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할 수 있고요. 퇴고를 하려면 ‘전략’이 필요합니다. 

 

 

‘용기’와 ‘전략’은 ‘메타인지’에서 비롯됩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바로잡는 고차원의 인지 작용이지요.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즉 메타인지의 핵심 기능은 ‘객관’입니다. ‘주관’에서 ‘객관’으로 시점을 바꾸지요. 의도적으로 ‘나’와 거리를 만듭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일과 관계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메타인지는 ‘재귀’의 원리로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단련(鍛鍊)’이지요.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드리고 식히는 과정을 반복하는 겁니다. 쇠붙이는 점점 강해지지요. 우리 인생도 경험과 사고의 재귀를 반복하며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결과의 변화를 경험하지요. 더 갈고 더 두드리며 양이 질로 바뀌는 기쁨을 만끽하는 겁니다. 

 

 

 

 

단련은 의식을 지속적으로 자극합니다. 우리 뇌를 끊임없이 활성화하지요. 뇌는 일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언제든 달라지지요. 이런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활성화에 도움이 됩니다. 무슨 일이든 의식의 활성화 정도에 따라 성과가 좌우됩니다. 스스로 자기 의식 상태를 점검하는 메타인지의 수준에 달려 있지요. 

 

 


 

 

학교야말로 ‘단련’하는 곳입니다. 배우고 성찰하고 성장하는 곳이지요. ‘시행착오’의 장입니다. 성공 경험이 가장 중요하지만 실패의 기회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정답만 외울 게 아닙니다. 새롭게 도전하고 부딪치며 넘어져봐야지요. 그러면서 내가 왜 실수하고 틀렸는지 따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 탓 환경 탓으로 돌리지 않고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거지요. 스스로 감독하고 통제하는 ‘자기조절력’을 발휘하는 겁니다. 이는 곧 ‘자신감’으로 이어지고요. 

 

 

학습은 쓰고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선명하게 의식해야 합니다. 목적에 부합하는 전략인지 점검해야 하고요. 그러면서 자기 제어와 감정 조절에 나서야 합니다. 이게 곧 ‘성찰’이고 ‘성장’이지요. 무엇이든 잘못을 고칠 수 있을 때가 좋은 겁니다. 언젠가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을 때가 오니까요. 

 

 

바둑에 ‘훈수 9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일가는 국수라 해도 옆에서 지켜보는 평범한 눈보다 못하지요. 대국의 당사자는 승부의 형세를 보기 힘듭니다. 정치도 그렇지요. 정치인만 정치를 못합니다. 국민은 ‘정치 9단’이고요. 그래서 국민만 바라보며 정치하라 강조합니다. 좀처럼 말을 안 들어 그렇지요. 

 

퇴고가 별거 아닌 듯하지만 바둑이나 정치처럼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시야를 넓혀 자기 잘못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니까요. 보다 용의주도해져야 하니까요. 글도 눈에 익으면 오류를 찾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환경과 조건을 바꿔보지요. 누군가는 자기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눈으로만 읽다가 입으로 읽고 귀로 듣지요. 주변 사람에게 한번 읽어달라고도 합니다. 컴퓨터로 작업했다면 프린트해 살펴보기도 하고요. 화면으로 봤던 느낌과는 전혀 다르지요. 써놓은 글과 시간을 두기도 합니다. 생각과 행동의 시간 차를 늘리는 거지요. 그러면서 ‘냉정’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처럼 퇴고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낯설게 하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뇌에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거지요. 

 

 

 

 

퇴고를 하다 보면 ‘무상(無常)’을 깨닫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는 건 없습니다. ‘나’도 나의 ‘뇌’도 말입니다. 밤새 쓴 연애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고 찢어버리는 일은 흔합니다. 밤새 보낸 몹쓸 메시지를 부랴부랴 삭제하는 일도 그렇고요.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지요. 그새 나름 성장한 셈이지요. 물론 밤과 아침이 주는 정서와 감정의 차이가 있지요. 더 큰 이유는 메타인지가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메타인지가 깜빡 졸아서 그런 거지요.

 

 

아이들은 내면의 깊은 사고를 하기가 힘듭니다. 자기 성찰이 쉽지 않지요. 욕심과 기대가 한창 클 때이니까요. 의욕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자기 성찰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성찰도 습관이니까요. 글을 쓰며 퇴고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용기와 전략 그리고 맥락을 꿰뚫는 관점의 힘을 체감하게 만드는 거지요. 

 

 


 

 

퇴고엔 끝이 없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붙들고 있을 순 없습니다. ‘마감(데드라인)’을 정해야 합니다. 어떤 작가는 마감이야말로 창작의 뮤즈라 했습니다.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주는 긍정적 효과이지요. 마감 후 그 홀가분함은 천국과 같을 겁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힘들 뿐이지요. 

 

교육의 가치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습니다. 과정을 포함한 전체 맥락 속에서 아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애써 고민한 퇴고의 흔적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천국보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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