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칼럼
무의식 | 허공을 뛰는 사람들
인생 칼럼
무의식 | 허공을 뛰는 사람들
어느 노랫말처럼 우리는 ‘동그라미’를 그리다 무심코 ‘얼굴’을 그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얼굴은 기억 속 누군가와 닮아 있겠지요. 첫사랑이거나 짝사랑일 수 있습니다. 자화상일 수도 있고요.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동그라미가 자극한 거고요. 물론 그 누구도 아닌 그저 사람 얼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조차도 동그라미가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킨 겁니다. 실상 사람의 얼굴은 동그랗지 않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원형에 가깝다 여겨왔고, 우리 무의식 속에 이미지로 굳은 것일 뿐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을 바탕으로 작동합니다. 의식은 수면 위로 드러난 무의식의 일각에 불과하지요. 머릿속에 의식처럼 떠오른 것들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생각해낸 게 아닙니다. 기억이 자극에 의해 발화된 거지요. 기억은 신경계에 남은 흔적입니다. 바로 그 흔적들이 자극에 의해 재생되고 연상되고 파생되며 우리는 반응합니다.
우리와 의식 사이에는 무의식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모르게 일할 뿐이지요. 또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을 뿐이지요.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의식이 무의식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찾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의식은 무의식의 일부가 드러난 것일 뿐 인간이 가진 인지 기능의 전부가 아닙니다. 신경계는 정서, 감정, 생각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복잡한 활동 중 일부가 드러나 인식된 것이 의식입니다. 제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절대 인간을 따라갈 수 없다고 전망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게 바로 ‘무의식’입니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축적되었지요. 지금 우리의 무의식은 그 범위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습니다.
좀 뜬금없지만 ‘멀리뛰기’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육상 경기 중 하나지요. 멀리뛰기는 힘을 높이는 도움닫기 후 몸을 솟구쳐 더 멀리 나아가는 겁니다. 특히 공중에서 발을 구르는 모습이 특이하지요. 선수는 반복 훈련으로 이런 ‘히치 킥’ 기술을 몸에 익혔을 겁니다. 한마디로 ‘체화’지요. 행동의 특정 패턴이 장기기억의 형태로 저장된 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겁니다. 이를 ‘절차기억’이라 하고요. 절차기억은 여러모로 기능합니다. 우선 각종 기술이 절차기억에 기댑니다. 악기 연주 같은 예술 행위도 몸에 배야 할 수 있고요.
만약 무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뇌에 과부하가 걸려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겁니다. 먹고 걷고 뛰고 말할 때마다 새롭게 뇌를 써야 할 테니까요.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만드는 메커니즘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기본적으로 신진대사가 필요합니다. 그 위에서 면역반응이 일어나며 생체조직이 기능하지요. 심장 박동, 체온 조절, 호르몬 분비 같은 생리작용에서부터 딸꾹질 같은 증세 그리고 습관, 욕구와 감정의 형성까지 모두 무의식적으로 행해집니다. 무의식의 궁극적 목적은 존속을 위한 항상성 유지입니다.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무의식에 의식이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지요. 인지 작용도 대부분 무의식이 이끕니다. 우리 인간은 무의식 덕분에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겁니다.
무의식은 우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무의식이 인생을 지배하는 거지요. 우리를 움직이는 진짜 주인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입니다. 하다못해 ‘아재폰(아저씨 휴대폰)’이라는 인식도 무의식의 작용에서 나온 겁니다. 무의식이 손을 뻗친 탓에 세대에 따라 선호하는 휴대폰 브랜드가 나뉘었지요. 해당 브랜드가 이런 인식을 불식시키고 변신하려면 젊은이들의 무의식에 호소해야 합니다.
안 그래도 무의식이 가장 많이 활용되는 분야가 ‘마케팅’입니다. 소비자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무의식으로 곧장 들어가 선택과 반응을 조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광고판에선 ‘서브리미널(subliminal)’이라는 용어가 노골적으로 쓰입니다. 이것은 ‘의식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의식이 떠오르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지요. 즉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식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무의식보다는 ‘비의식(非意識)’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과정인 ‘잠재의식’이라 해도 좋고요. 무의식은 언제나 의식보다 빠릅니다. 서브리미널 광고 역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짧고 빠르게 매체 위를 흐르고요. 그러면서 의식을 휘어잡을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부지불식간에 물건을 선택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 마케팅은 곳곳에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벌이는 코카콜라의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이 대표적이지요. 겨울 시즌 매출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산타를 등장시켜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냈지요. 오랜 세월 크리스마스 시즌에 반복 노출되었고요. 그 덕분에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를 보면 자연스럽게 코카콜라를 떠올립니다.
또 코카콜라가 여전히 브랜드 가치와 평판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데는 ‘북극곰’도 큰 몫을 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상징이 되어버렸을 정도지요. ‘크리스마스=산타=코카콜라’, ‘북극곰=코카콜라’가 된 겁니다. 광고가 만들어낸 일종의 ‘프레임’인 셈입니다. 한마디로 ‘스키마(schema)’가 형성된 거지요. 스키마는 지난 경험과 학습으로 형성된 인지 구조를 말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며 인간의 행동 반응을 결정하지요. 그러고 보니 최초로 코카콜라병을 예술 작품에 등장시킨 인물이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군요. 초현실주의 미술은 무의식을 닮았지요. 코카콜라는 이래저래 무의식과 관계를 맺고 있는 셈입니다.
출처 : 코카콜라
다시 멀리뛰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멀리뛰기는 도약 후 동작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공중에서 구르지 않는 기술을 가진 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중에서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유리합니다. 신기하게도 일반인이 멀리뛰기를 해도 엉성하나마 비슷한 동작을 합니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지요. 도움닫기를 하던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계속 허공에 남아 있는 겁니다. 우리 몸은 걷거나 뛰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새삼 ‘멀리뛰기’라는 이름이 재밌게 느껴집니다. ‘허공을 뛴다’는 의미이니까요. 마치 초현실주의 미술 같습니다. 생각 없이 그린 낙서 같기도, 꿈의 세계 같기도 하지요. ‘초현실’이라는 말 자체가 의식과 무의식을 혼합한다는 뜻입니다. 멀리뛰기는 허공에서 더 많이 뛰는 선수가 이기는 경기이니 대단히 초현실적입니다. 멋지지만 낯설지요.
그렇습니다. 무의식적 욕망은 우리를 허공에서도 뛰게 만듭니다. 무의식이 눈에 보이는 거지요. 어쩌면 우리가 새처럼 날지 못하기 때문에 멀리뛰기도 있고, 높이뛰기도 있는 건지 모르지요. 물 위를 걷지 못해 팔과 다리로 수영을 하듯 말입니다.
인간 신체의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스스로 날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계적인 멀리뛰기 선수들 중에도 공중에서 네 걸음 이상 걷는 선수는 아직 없습니다. 더 멀리 뛰기 위해서는 몸을 아무렇게 내던져서는 안 됩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할 정도로 꾸준히 기량을 연마해야 하지요. 무의식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세계 신기록을 세우겠다는 보이지 않는 일념이 기적을 만드는 겁니다. 인생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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