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칼럼

관계 | 시장이 활기로 가득 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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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시장이 활기로 가득 찬 이유

동트기 어시장은 힘이 넘칩니다. 뜨는 해를 이길 기세로 환히 빛납니다. 갓 잡은 생선도 크고 탄력 있게 뜁니다. 비릿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주변을 맴돌던 갈매기도 활개를 폅니다. 손님을 부르는 상인의 외침이 우렁찹니다. 오감이 일어나 기지개를 켭니다. 

 

힘이 쇠한다 느낄 때 일부러 시장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활기(活氣)’를 되찾기 위해서지요. ‘살아 있다’는 실감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엔 언제나 시장이 열립니다. 우리는 시장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파는 사람은 여하튼 제값 받으려 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튼 깎으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난장판’에 가깝습니다. 서로의 욕망과 이해가 뒤엉켜 뒤죽박죽되기 일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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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어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거래가 순조로운 건 아닙니다. 팽팽한 기 싸움 속에 생사의 기로에 선 활어는 눈치만 봅니다. 서로 조금이라도 이득이 안 되면 거래는 깨집니다. 그러니 거래를 성사시키는 흥정은 고도의 속셈이자 수작입니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 했지요. 그렇습니다. 흥정은 좋은 일입니다. 서로 행복해지려고 발버둥치는 일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활기’입니다. 서로 살아 있음을, 그리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곳이 시장인 겁니다.

 

한창 바쁜 시장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볼까요? 왜 사는지. 그러면 그저 웃을까요? 유명한 시구처럼 말입니다. 웃기만 하고 답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난처하단 거겠지요. 웃으며 슬며시 피하는 겁니다, 잘 모르니까요. 웃기만 하면 겸연쩍어 그냥 ‘행복’이라 답할 순 있겠네요. 그래도 또 웃을 겁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또 모르니까요. 그렇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말은 왜 사는지 모른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행복을 바라는 부조리한 ‘인간’이지요. 행복이란 게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차라리 속 편하겠습니다. 누구든 돈만 벌면 되니까요.

 

 


 

 

우리 헌법에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행복추구권’이지요. 여기서 ‘행복’은 엄연히 법률 용어인 셈입니다. 엄정한 법의 세계에 쓰이다니 대단히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인간다운 삶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행복을 추상적 개념으로만 규정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행복이 무엇인지는 다툼의 여지가 있습니다. 잠자고 햇빛을 쐬는 일부터 자기 결정과 개성 발현까지 권리로서 행복은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법도 이러하니 행복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라 그 뜻을 정의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헌법에 등장할 정도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어린 남매와 같지요.

 

엄밀히 말하면 행복의 바탕은 ‘욕망’입니다.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바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거에 경험한 ‘기억’이 욕망을 만듭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자식을 잘 키우고 싶은 욕망, 성공하고 싶은 욕망, 세상을 좋게 바꾸고 싶은 욕망도 그 본질은 ‘기억’입니다. 기억이 원하는 상황이나 대상을 설정하여 욕망을 만들고, 그 욕망이 원하는 바를 ‘행복’이라 여기게 된 것이지요.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욕망은 신경전달물질이 제공하는 ‘신경 보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욕망의 목적은 ‘행복감’을 획득하는 데 있습니다. 활기, 쾌감, 기쁨, 즐거움, 재미, 흥미, 기대, 희망 등의 느낌은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이 연출하는 ‘행복감’일 뿐입니다. 행복감을 경험하면 그때의 상황이나 대상이 기억으로 저장돼 잠재적으로 욕망이 되는 거지요. 요컨대 욕망과 행복 모두 행복감의 기억이 만든 느낌일 뿐입니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던 어린 남매도 꿈을 꾸었던 거지요. 어떻게 보면 남매가 성탄 전야에 꾸었던 꿈은 ‘기억’이었는지 모릅니다. 꿈은 기억을 닮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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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쓰는 영어 ‘Happy’의 어원을 좇다 보면 ‘Happen’과 만나게 됩니다. 계획이든 우연이든 행복하려면 일단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일이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가져오면 그게 ‘행복’이라는 겁니다. 감독이 외치는 ‘액션’ 소리에 배우가 카메라 앵글로 들어가듯 우리도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지요,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움직여야지요, 행복이 일어나도록 기회를 만나야지요.

 

 


 

 

이처럼 파랑새를 찾아 나서는 일을 우리는 ‘상호작용(相互作用, interaction)’이라 합니다. 상호작용은 사람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모든 과정이나 방식을 말합니다. 상호작용은 우리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얻게 해줍니다. 또 외로움을 떨치며 자존감을 잃지 않게 돕습니다. 특히 우리의 욕망을 건강하게 성장시키며 나보다 더 크고 넓은 세상에 헌신하도록 만듭니다. 물론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닙니다. 상호작용의 양태에 따라 오히려 갈등으로 번지고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요즘 유행하는 말인 ‘손절(損切)’로 대응하기도 합니다. 더 손해나기 전에 관계를 끊어버리는 거지요. 또 복잡한 관계에서 오는 이른바 ‘사회독(社會毒)’을 빼내기 위해 일부러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이렇듯 ‘자기애’만 가득한 불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상호작용을 포기하면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기쁨과 성장의 기회마저 사라집니다. 세상에 든 이상 세상과 금을 긋고 살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상호작용은 두 세계가 얽히고설키는 것입니다. 서로의 욕망이 얽히고설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인간은 증강됩니다. 인생의 변화와 성장은 결국 상호작용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지지고 볶더라도 한데 어우러져 서로 의지하고 협조하며 살아야지요, 희로애락을 나눠야지요. 시인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에 가고 싶다고 노래했습니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섬을 발견했던 거지요. 그리고 접촉을 시도합니다. 시인이 가서 닿으려는 그 섬은 ‘행복’ 아닐까요? 내가 욕망하는 것과 네가 욕망하는 것 그 사이에 행복이 있고, 그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상호작용인 것이고요.

 

 

세상의 본질은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관계’입니다. 이 특별히 가르칠 필요 없이 스스로 자각합니다. 혼자 공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보면 같이 놀아주고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똥이게요. 작정하고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 일 조금 어리석습니다. 사람마다 원하는 행복의 모습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모으고 쓰면서 행복을 얻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실현과 초월 그리고 완전한 자유 같은 정신적 완성을 통해, 혹은 절대자를 통해 행복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원하는 추구하는 것이지요. 엄청난 부를 이룬 부자도, 이타의 삶을 사는 자선사업가도, 오지의 산중에서 홀로 고행을 하는 구도자 모두가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사실 행복은 도달해야 할 인생 궁극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도도히 흐를 뿐이고, 그 흐름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 ‘이따금’ 느끼는 ‘행복감’이면 됩니다. 또 그것이 우리 안에 잠시 머물다 사라져버려도 그걸로 충분한 겁니다. 우리는 과거를 끝없이 재해석하며 기억합니다. 조금 전 일도 똑같이 기억하고 재현하지는 못합니다. 똑같은 영화를 돌려봐도 볼 때마다 감흥이 다릅니다. 전에 안 보였던 인물이 보이고, 안 들렸던 대사가 들리지요. 지금의 나와 그것을 기억하는 나는 이미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기억으로 살아가는 셈이지요. 이것이 인간의 기억과 데이터가 다른 점입니다. 인간의 행적은 데이터가 될지언정 기억을 고정불변의 데이터로 만들기는 힘들다는 말입니다. 뜻하지 않게 만난 사람과 의도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이 재현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다만 우린 그만큼 상호작용해야 합니다.

 

 

138억 년 만에 온 당신과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요! ‘우리’는 곧 ‘우주적’ 만남입니다. 서로의 인생을 함께 잘 일구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행복은 그런 ‘우리’ 사이에 있고, 인생의 수준은 인간을 이해하는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상호작용 속에서 관계를 맺고 일을 하고 사랑하며 믿고 존중하는 것도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범주에 포함되지요. 인간을 안다는 것은 곧 세상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제대로 아는 것이 행복한 삶으로 향하는 첩경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묻기 전에 나는 누구인지, 인간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질문이지요. 

 

 

그새 좌판 할머니는 허리춤 전대에서 제법 두꺼운 돈뭉치를 꺼내 세어보고 또 세어봅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네요. 언젠가 어시장에서의 일생은 기억으로 남겠지요. 새벽같이 일어나 고단한 몸을 이끌고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가치는 행복의 기억보다 더 위대합니다. 정작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게 아닐까 싶네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이미 함께 있다는 걸요. 수많은 ‘행복들’이 여전히 활기를 띠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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