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칼럼
기억 | 당신이 연인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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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당신이 연인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연인들은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레는 감정을 떠올리는 것을 좋아한다. “나 처음 봤을 때 어땠어? 처음 봤을 때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라는 질문은 연인들의 단골 레퍼토리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네가 그때 내게 윙크를 했잖아. 그 모습이 예뻐 보였어”라고 하면 상대는 “내가 언제 윙크를 했어. 지난번에는 활짝 웃을 때 보조개가 예뻤다며!”라고 따진다.
연인을 처음 만나는 순간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법한데, 왜 우리는 그런 순간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왜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의 내용이 이리저리 바뀌는 걸까? 더구나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의 만남을 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감정과 모습으로 기억하게 되는 걸까?
기억은 컴퓨터의 저장공간처럼 특정한 장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언가 기억나지 않는 순간에 당황하는 것은 기억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어딘가에 저장된다는 믿음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으며, 심리학자들 역시 어떤 ‘기억 저장소’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1968년 기억 연구자인 앳킨슨(Atkinson)과 쉬프린(Shiffrin)에 의해 제안된 ‘다중 기억 모델’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감각적 경험(시각, 청각 등 감각을 통해 얻는 경험)을 통해 유입되는 정보들은 감각 기억, 단기 기억, 장기 기억의 세 가지 형태로 저장된다. 외부 정보는 우선 감각 기억에 일시적으로 저장되고, 그 가운데 주의(attention)를 기울인 일부 정보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 단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그리고 단기 기억에서 부호화(encoding; 외부 환경의 정보를 뇌에서 저장하고 회상할 수 있는 구조로 변환하는 과정)된 정보들은 나중에 인출하기 위해 장기 기억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는 정보는 필요할 때 다시 단기 기억으로 전환되어 인출된다. 이후 잘 알려진 기억 연구자 배들리(Baddeley)도 작업 기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지만, 해당 개념도 일시적으로 저장된 기억을 조작하고 작업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처럼 이후에도 여전히 기억이 어딘가에 저장된다는 관점은 기억 연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어 왔다.
이렇듯 기억은 컴퓨터의 저장 공간처럼 특정한 장소에 저장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뇌의 부위 중 하나인 해마(hippocampus)가 기억의 저장소 역할로 지목되곤 하였다. 그러나 신경과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 가지 기억을 획득하고 인출하는 데에도 뇌의 여러 부위들이 함께 관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기억은 머릿속 어딘가 공간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꺼내어진 것이 아니라 뇌 전반을 거친 신경세포들의 활동 패턴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컴퓨터에 있는 어떤 파일처럼 어딘가에 저장되고, 필요할 때 검색을 통해 인출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기억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흔적이다
기억이 저장되는 것이 아니고 뇌 전반에 활동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저장된 것을 불러온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까? 며칠만 지나도 흐려지는 기억도 있고, 몇 년이 지나도 생생한 기억도 있을 뿐 더러 똑 같은 경험을 해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는 우리의 기억이 컴퓨터처럼 완벽하게 복사하고 붙여넣기 하는 시스템으로 저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억에 관한 여러 신경과학 연구들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을 통해 유입되는 감각 정보들은 뇌에 ‘흔적’으로 남는다. 우리가 특정 경험을 할 때 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신경세포들이 발화하고 서로 연결되는데, 그 발화와 연결의 패턴이 일종의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엔그램(engrams)이라고 불리며, 뇌신경계 정보의 최소 단위라고 할 수 있다.
뇌를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 안에 기억이란 것은 없다. 기억을 저장하는 뇌 부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뇌에 있는 것은 특정 신경세포들이 발화하고 연결하면서 형성되는 신경 흔적뿐이다. 신경 발화의 패턴이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은 기억들이 ‘저장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기억한다’거나 ‘기억이 떠오른다’라고 하는 우리의 경험은 신경세포들의 발화와 연결로 인해 만들어지는 느낌인 것이지, 저장된 것을 꺼내 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억의 강도는 가치가 결정한다
기억이 경험 정보 그대로를 저장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경 흔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어째서 어떤 흔적은 뚜렷하게 남고 어떤 흔적은 흐릿하게 남는 것일까? 다시 말해, 왜 어떤 기억은 선명하고 어떤 기억은 흐릿한 것일까?
그것은 기억이 사건이나 정보의 무작위적 집합이 아니라 의미와 중요성에 기반하여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경 흔적의 형성도 의미와 중요성의 영향을 받아 그에 맞게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기억이 신경 흔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정보에는 신경세포들로 이루어진 신경망이 보다 강하게 연결되어 발화한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정보란 달리 말해 ‘가치’ 있는 정보를 말한다. 여기에서의 가치는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가치를 포함해 타인과 더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가치를 가리킨다.
뇌는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경험을 할 때 더 잘 발화하고 연결됨으로써 더 뚜렷한 신경 흔적을 남기고, 그 결과 우리는 그 경험을 더 잘 기억하게 된다. 같은 하루를 살아가더라도 생일 파티를 했던 날은 유독 더 기억이 잘 나고, 생일 파티 중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면 다른 해 생일 파티보다 더 잘 기억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기억은 학습을 위해 재활용된다
기억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학습’이다. 우리는 기억을 바탕으로 특정 행동이 가져온 결과의 가치를 학습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예측과 현재 행동을 조정한다.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어떤 행동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구조를 가진다. 특정한 결과를 기대하고 행한 행동, 그리고 실제로 그 행동을 행함으로써 얻은 결과, 이렇게 말이다. 높은 성적을 받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서 그 결과로 높은 성적을 얻은 기억, 맛있는 저녁을 먹겠다는 목표로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갔지만 그 결과 맛없는 저녁을 먹게 된 기억 등 대부분의 기억이 인과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이러한 형태로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던 행동은 반복하고,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던 행동은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떤 행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면 뇌는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해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동시에 이러한 신경 보상은 관련된 신경망을 더욱 강화한다. 어떤 형태로든 긍정 경험을 하게 되면 뇌의 보상 작용과 연결되면서 관련 신경망이 강화되고, 이는 관련 기억을 선명하게 함으로써 나중에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도록 유도하게 된다. 기억은 경험 정보에 기대행동-행동결과의 인과관계와 더불어 신경 보상을 통해 느꼈던 긍정적 감정까지 덧입혀 놓음으로써 다양한 상황에서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고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는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이 이처럼 가치 중심적으로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는 데에 재활용되는 것은 생물학적 ‘항상성’의 유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인류 조상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과 더불어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생존에 유리한 행동은 보상을 통해 강화되고, 강화된 행동은 반복됨으로써 뇌의 신경망에 영향을 미쳐 장기적으로 행동 패턴과 인지 구조에 변화를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메커니즘은 진화를 거치며 축적된 복잡한 신경생물학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돌아가서, 연인들이 서로에게 매료된 순간을 서로 다른 장면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기억은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고정된 공간이 아닌, 뇌 전반의 활동과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패턴에 의해 형성되고 재구성되는 동적인 과정이다. 중요한 순간이나 경험은 각 개인이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그 동안의 뇌신경망 패턴에 기반하여 강렬한 신경 흔적을 남기며, 이러한 흔적은 추후에 더 선명하게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같은 상황도 개인마다 서로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 따라서, 연인들이 처음 만난 순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오류나 착각이 아니라, 기억 형성의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에 기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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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tkinson, R. C., & Shiffrin, R. M. (1968). Human memory: A proposed system and its control processes. In Psychology of learning and
motivation (Vol. 2, pp. 89-195). Academic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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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addeley, A. (1992). Working memory. Science, 255(5044), 556-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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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osselyn, S. A., Köhler, S., & Frankland, P. W. (2015). Finding the engram. Nature Reviews Neuroscience, 16(9), 52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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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ssadi, S. M., Yücel, M., & Pantelis, C. (2009). Dopamine modulates neural networks involved in effort-based decision-
making. Neuroscience & Biobehavioral Reviews, 33(3), 383-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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