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칼럼

성공 | '운(運)'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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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 '운(運)'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대도시 중앙역에는 언제나 인파가 넘쳐납니다. 출발과 도착이 쉴 새 없이 엇갈리거나 마주치지요. 바쁘게 흐르는 시간의 틈새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 주변만 무기력하게 맴돌거나 구석 한데에서 잠만 자지요, 마치 잠이 집인 것처럼. 이런 사람을 영어로 ’unfortunate’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무턱대고 능력 없거나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 찍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다 운이 없어 풍파를 맞은 거라며 조심스럽게 돌려 말합니다. 능력보다 운에 좌우되는 인생의 초상이 담겨 있는 셈입니다. 이들은 그저 나보다 운이 없을 뿐이지요. 그런데 이런 표현이 꼭 완곡이나 과장인 건 아닙니다. 

 

 

 

 

‘운(運)’이란 것은 그 말이 생겨먹은 그대로 나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습니다. 돌고 돌며 끊임없이 움직여대니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고, 덧없기까지 합니다. 기이하게도 ‘운’을 뒤집어 보면 ‘공’이 됩니다. 구르는 그 공 말입니다. 어디로 튀어 얼마나 굴러갈지 알 수 없지요. 인생의 일정 궤도에 오른 사람도 더 높은 자리로 가려면 그땐 반드시 운이 따라야 한답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도 있고요. 제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없지요. 기업 경영 역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정세나 경기에 성패가 지배되곤 합니다. 평범한 일상의 이면에도 운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거리를 걷거나 자동차를 몰면서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누군가 방심하면 사고가 납니다. 운은 세찬 비바람이나 불길, 눈보라처럼 보이진 않지만 끊임없이 우리 곁에서 요동치고 있는 것이지요. 운은 곳곳에 실재하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그러니 우리 누구도 결코 평범하게 사는 게 아닙니다. 운에 따라 구르고 구르며 살지요. 

 

세상에는 ‘운이 나빴다’는 위로의 말도 있지만 ‘운이 좋았다’는 겸손의 말도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운에 거의 모든 공을 돌리며 한껏 자세를 낮추는 겁니다. 영리하지 않거나 재능이 없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또 좋은 운을 가져오고요. 사실 성공이 운에서 왔다고 인정하는 겸손은 말처럼 실행하기 쉽지 않습니다. 대개가 세상 없이 사는 사람처럼 굴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운도 공짜는 아닙니다. 특히 세상이 주는 기회를 회피하지 않을 때 효력이 나타나지요. 하찮게 보이는 반복적인 일도 매일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차를 내주며 환대하는 것입니다. 작은 기회라도 작게만 보지 않는 것이지요. 어떤 기회든 스스로 그 가치를 드높여 ‘일생일대(一生一大)’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일생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보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마음으로 말이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회는 우연히 ‘만나는’ 것이면서 동시에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방송에 산후조리원 동기에서 ‘전국노래자랑’ 스타가 된 두 엄마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들 모두 집에만 있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무기력했다지요. 그런데 둘이 다시 만나 세상이 마련해준 열린 무대에 조금 용기를 내어 도전했더니 행복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불꽃의 율동과 함께 열창했던 노래가 마침 ‘평행선’이었습니다. 그 노랫말처럼 ‘나는 나밖에 모르고 너는 너밖에 모르’면 결코 만날 수 없었겠지요. 운이 가는 길을 알 수 없다고 운은 운대로 나는 나대로 끝없이 평행선만 달려야 되겠습니까! 나서야지요. 

 

보통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시험 문제 10개를 다 찍어도 7개는 맞힐 수 있다는 맹랑한 낙관이 아니지요. 점집을 찾아다니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고요. 그러면 점집은 일 년 내내 성수기를 맞게요. 사람의 일은 재주나 노력보다 운에 달려 있으니 그저 겸손하고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운칠복삼(運七福三)’도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운’과 타고나는 ‘복’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운은 세상의 변수이고, 복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과거의 변수로 나타나는 법이지요. 성공의 요인이 운과 복이 전부라니 이 말은 좀 허무하기까지 합니다.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먼저 주어야 기회를 얻고, 더 많이 주면 더 큰 기회를 얻습니다. 받기만 해도 아쉬운데 무엇을 더 내준다는 걸까요? 그 누구도 자기가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른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구하는 겁니다. 서로서로 부족한 점을 채우며 돕고 살아가는 모양새지요. 인생은 이런 ‘상호작용(interaction)’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인생은 사람을 만나는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태어나 제일 먼저 부모를 만나지요. 그리고 형제자매가 생겨납니다. 친구와 스승과 동료와 연인, 배우자 그리고 자식을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요. 이런 우연 속에서 우리는 또 사람의 일을 하며 서로 상호작용을 합니다. 여기서 상호작용이란 결국 서로 원인과 결과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원인을 만들고 그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기고, 다시 그 결과가 새로운 원인으로 이어집니다. 성공한 사람이 단순히 운이 좋고 복이 많았던 건 아닙니다. 그런 건 복권 당첨 때나 할 말이지요. 이들은 그 누구보다 상호작용에 열심이었고, 그 결과로 기회가 주어졌고, 그것을 움켜잡았던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의 상호작용을 해낸 것이지요. 어찌 보면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겠습니다. 

 

 

 

 

‘복(福)을 짓는다’는 말이 이와 비슷합니다. 밥과 집과 옷을 짓듯 복도 짓는다는 뜻이지요. 성공은 복을 지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은 ‘운칠복이지일(運七福二志一)’이 더 마땅할지 모릅니다. 복을 짓는 것은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영역에 있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판단과 선택은 실상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합니다. 무의식은 기존의 상호작용 경험과 기억으로 형성되니 결국 과거 변수지요. 가치에 대한 판단과 선택, 선택한 가치를 획득하겠다는 의지의 발현 모두 무의식의 기억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세상은 ‘우연’의 변수이고, 세상과의 상호작용하며 욕망을 거래하는 나는 ‘과거’의 변수인 셈입니다. 인간의 뇌와 신체 기능이 미처 여물지 않은 때 생긴 나쁜 사건이 인생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많이 볼 겁니다. 참 애꿎지요. 그런데 또 생각을 달리하면 과거만큼 훌륭한 스승은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불교에서는 아예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하지요. 그러니 인생의 성패는 이런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세상의 변화를 느끼는 ’예민함’과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 ‘예리함’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과거의 결과로 현재가 존재한다고, 또 그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현재가 차곡차곡 쌓여 다시 최상의 미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결국 ‘세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바다처럼 더없이 넓고 크지 깊지요. 운과 기회가 골고루 퍼지도록 만들어진 이 세상 자체의 ‘조화(造化)’인 것입니다. 

 

 


 

 

최선의 상호작용이 빚는 최상의 결과는 결국 ‘곱하기(Ⅹ)’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구구단은 곱셈의 기초입니다. 아이 때부터 특유의 리듬을 붙여 외우게 하지요. 죽을 때까지 써먹어야 하니 말 그대로 ‘체화(體化)’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구단 1단은 쓸모가 없습니다. 1에는 1부터 어떤 수를 곱해도 그 수 그대로니까요. 하나 마나 해서 곱셈에서 1은 ‘항등원(恒等元)’이라고 합니다. 나아지는 게 없으니 답답할 뿐이지요. 기왕 곱셈을 떠올렸으니 내친김에 인생 공식을 만들어볼까요? 인생은 자신과 세상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 본질만 간명하게 담으면 ‘인생=자신Ⅹ세상’이 됩니다. 자신의 ‘능력’과 이를 최대한 사용하고자 하는 최선의 ‘의지’에 세상이 주는 ‘기회’와 ‘운’이 만나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얼핏 다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혹시 나의 정체성과 동일성만 고집하며 1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심지어 세상조차 0으로 만들어버리는 0의 존재는 아닌지! 

 

우리가 바라는 ‘성공’ 역시 공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성공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만들어진 성과들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다만 여기서는 자신과 세상의 상호작용이 ‘부등호(〈)’입니다. 즉 ‘성공=자신〈세상’입니다. 성공을 돕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또 세상은 나를 짓누를 만큼 큰 것이 아니라 나를 안을 만큼 크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은 열려 있다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성과를 만들어낼 기회를 주고 운이 돌고 성장의 무대가 되어주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누구나 바로 여기, 이 세상에 있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힘도 재주도 생각도 무궁무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믿으십시오. 세상과 평행선만 달리지 말고 세상에 더 많은 것을 주며 복을 지으십시오. 스스로를 두려워하고 되돌아보며 이 불확실한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십시오. 

 

이 세상에 처음 도착한 기분으로 중앙역을 빠져나옵니다. 다시, 나를 버리고 세상으로 흘러들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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