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토끼의 노래 | 뇌의 가소성과 잠재된 희망
교육 칼럼
토끼의 노래 | 뇌의 가소성과 잠재된 희망
빗소리가 들려오면 누군가는 이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가 만든 영화음악 ‘레인’이 워낙 귀에 익숙해서 그렇지요. 또 비 오는 날 양동이를 뒤집어쓴 채 빗소리를 듣는 영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유치원 시절 첫 곡을 만들었습니다. 집에서 토끼를 돌봤던 적이 있는데 그 일이 음악이 되어버렸지요. 선생님이 토끼를 길러본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보라 했고, 우선 노랫말부터 만들었습니다. 엄마한테 좀 도움을 받았지만 멜로디도 거의 직접 붙였고요. 세상에 내가 만든 나만의 것이 처음 생겼고, 그는 그 느낌을 ‘근질거림’이라 표현했습니다.
처음엔 토끼를 길러본 일도 그렇고, 그걸 노래로 만드는 이유도 도무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에게 토끼를 돌보는 일은 기대와 달리 고역이었기 때문이지요. 자기 밥보다 토끼 먹이를 먼저 챙겨야 했고 수시로 똥을 치워야 했습니다. 토끼는 그 순한 외모와 달리 손가락을 물기 일쑤였고요. 토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걸 떠나 이런 고달픈 현실을 노래로 만든다는 건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두 세계가 완전히 다른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현실과 음악이 주는 느낌이 서로 어긋나면서 꼭 들어맞기도 했던 겁니다. 그는 생전 일기에 ‘구름의 움직임도 소리 없는 음악 같다’고 적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음악이 될 수 있고 이미 음악이라는 생각이 이 ‘토끼의 노래’로부터 싹튼 거지요.
어린아이가 음악과 같은 고도의 ‘추상(抽象)’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걸 만든다는 건 더더욱 어렵지요. 그런데 완전히 불가능한 건 또 아닙니다. 음악의 원리를 벗어난 엉터리라 해도 누구나 만들 순 있지요. 전문가 못지않은 작품이 나와 세상을 깜짝 놀랠지 아무도 모르고요. 안 해서 그렇지 인간의 뇌는 스스로 한계를 짓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들도 관계를 만들어 연결시키고요. 그 덕분에 추상이 우리 곁에 생생히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음악뿐만 아니라 언어도 수학도 일종의 기호 체계이니 추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더하고요. 이런 관념과 상징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인 겁니다. 인간이 이 세계를 호령할 수 있게 된 힘도 여기서 나왔고요.
학령 전 아동기는 미움 받는 걸 무릅쓰고 호기심이 가장 왕성할 때입니다. 무모해도 탐험에 나서는 일을 마다하지 않지요. 아직 사회성이 덜 발달해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솔직한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의적으로 보일 때가 많고요. 가령 우리가 자주 쓰는 ‘비유’라는 표현법은 우리 뇌의 세련된 작동 방식 중 하나입니다. 어른의 굳은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견도 아이들은 척척 해내지요. 어른의 눈엔 ‘모자’로 보이는 그림도 아이의 시선으로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지만 들어 있을 건 다 들어 있다는 힌트만으로 ‘씨앗’을 맞히기도 하고요. 사람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잡기 좋은 ‘손잡이’라며 슬쩍 엄마 손을 잡기도 합니다. 그런 엄마를 ‘외계인’이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편의점’으로 빗대며 엄마를 달랠 줄도 알고요.
아이가 만드는 세계는 관계와 연결이 무한합니다. 어떠한 제약과 한계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뇌를 그대로 닮았지요. 뇌과학의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가 뇌가 가진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을 밝혀낸 일입니다. 우리 뇌는 변할 수 있고 또 변하지요. 인생이 ‘무상(無常)’한 건 어쩌면 이런 뇌의 가소성에서 비롯된 건지 모릅니다. 뇌도 신경계의 일부이므로 신경이 가소성을 가진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신경 쓴다’거나 ‘신경을 한곳에 모은다’는 말을 씁니다. 아이의 뇌도 신경이 가고 모이는 방향으로 강화되지요. 그러면서 습관으로 나타나고요. 특히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변한다는 건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뇌의 가소성 안에 우리의 잠재된 희망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 ‘머리가 나쁘다’는 말은 아이한테 함부로 쓸 게 아닙니다.
뇌의 가소성은 인간이 가진 최대 강점입니다. 교육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뇌는 ‘우리처럼’ 일하기 싫어합니다. 에너지를 쓰는 일에 무척 인색하지요. 심리학자 수전 피스크는 편한 방식을 선호하는 뇌의 성향을 가리켜 ‘인지적 구두쇠’로 표현합니다. ‘게으른 천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뇌가, 우리 인간이 모두 그런 겁니다. 보통 ‘일을 잘한다’는 의미는 어렵고 복잡한 걸 단순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단 겁니다. 어찌 보면 추상의 대표격인 수학의 본질과 좀 비슷하지요. 또 우리는 일을 잘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뇌를 쉬게 만드는 구세주이니까요. 수학의 원리 역시 보이지 않을 뿐 우리의 일상을 힘껏 돕고 있지요. 하지만 편의만 찾는 경향은 자칫 뇌의 퇴화를 불러올지 모릅니다. ‘아끼면 똥 된다’는 속담은 뇌에도 해당합니다. 뇌는 쓰는 만큼 좋아집니다. 대신 안 쓰면 줄 끊어진 연처럼 그 잠재력이 날아가버리고요.
인지과학자 개리 마커스는 우리 뇌가 어설프고 조잡한 인터페이스를 닮았다며 뇌를 ‘클루지(kludge)’라고 부릅니다. ‘엉터리 컴퓨터’라는 겁니다. 착각 때문에 난처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겁니다. 물론 이 말에는 뇌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는 희망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뇌가 완벽하지 않아 오히려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니 다행이지요. 어른들에겐 당연한 것도 아이들에겐 당연하지 않습니다. 또 어른들은 대충 안다고 생각하니까 궁금한 게 없을 수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거지요. 클루지가 작동하는 겁니다. 클루지가 만든 함정에 깊숙이 빠져 있는 거고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싶은 게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이든 배우고 싶습니다. 한창 똑똑한 컴퓨터가 되고 싶을 때이니까요.
영유아기는 뇌 발달의 ‘꽃 같은 시절’입니다. 일생을 통틀어 뇌 발달에 가장 좋은 기회가 주어지는 시기이지요. 왼손잡이인 류이치 사카모토가 바흐의 곡을 사랑했던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오른손 멜로디, 왼손 반주의 평범한 형식과는 달랐으니까요. 오른손과 왼손 모두 역할 규정 없이 똑같이 중요했고, 그걸 통해 피아노 연주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떤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뇌를 쓰는가에 따라 습관과 성격이 만들어지고, 역량까지 달라집니다. 그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판’이 깔리지 못해 끼와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이지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참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고요. 교육이랍시고 퍼붓는 잔소리가 아이의 풍부한 잠재력을 짓눌러선 안 됩니다.
뇌의 가소성은 뇌의 가능성 혹은 아이의 가능성과 같은 말입니다. ‘자신감이 재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긍정적 평가와 상호작용은 늘 자신감을 높입니다. 이와 더불어 ‘자기 통제력’도 몇 배로 늘립니다. 뭔가 스스로 조절 가능하다는 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신경전달물질의 활성 덕분에 동기와 활력이 생기는 거지요. 뇌의 보상체계가 강화되는 겁니다. 이처럼 자신감 역시 뇌의 가소성에서 비롯됩니다. 아이에게 무턱대고 잔소리를 해대는 부모나 교사의 심리에는 ‘비교’라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세간의 기준을 그대로 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거지요. 아이가 그 기준에서 멀어지면 잔소리를 퍼붓고, 아이의 자신감은 바닥을 칠 겁니다. 어차피 아이는 맹랑하고 기괴하고 엉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행착오가 있어도 그걸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이를 위한 ‘교육’입니다.
봄비가 오면 새싹이 올라올 겁니다. 땅속에 씨앗으로 묻혀 있어 우리 눈에 안 보였을 뿐이지요. 이렇게 잘 보이진 않지만 ‘추상’은 쓸모가 있습니다. 수학처럼 말이지요. 실상은 세계 자체가 ‘가상’입니다. 그렇지요, 각자의 뇌가 만든 세상이니까요. 그 유명한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말도 ‘생각 덩어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구’라는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주지요. 누군가는 바로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라고 했고요. 음악 역시 추상입니다. 음악이 단순히 기호와 신호로 이루어져 있단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공감’이라는 ‘의미’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지요.
음악은 시간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합니다만, 음악은 흐르는 것 같습니다. ‘넘돌이’ 또는 ‘넘순이’로 불리는 페이지 터너가 책을 읽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악보를 넘기는 걸 보면 좀 더 분명해지지요. 이렇게 음악이 흘러가며 류이치 사카모토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 그는 새로운 소리를 모으러 여기저기를 다녔습니다. 음악의 가능성을 찾아 세상을 떠돌았던 거지요. 특히 빗물 떨어지는 소리, 빗물이 다른 사물에 부딪치는 소리를 모았습니다. 이토록 빗소리를 사랑한 그는 자연의 빗소리가 되었을 겁니다. 빗소리가 들려오면 누군가는 이 사람을 떠올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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